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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 아래와 조수의 리듬

Below the Rating and the Tide's Rhyt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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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단말이 내일을 인쇄한다는 것을 안 뒤로, 나는 그 앞에 앉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십일월 십칠일, 단말은 내가 앉기도 전에 한 장을 토해 냈다.

신용평가사의 등급 강등 통지였다. 자사의 신용등급을, 한 단계 아래로 내린다는. 상단의 일자는 — 십일월 십팔일. 내일이었다. 발표되지 않은 강등이, 발표 하루 전에 내 단말로 도착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적중하리라는 것을 이제 안다. 시재표가 그러했고, 단말의 잔액이 그러했다. 내일, 평가사는 이 강등을 발표할 것이다. 그러면 외국 채권자들은 단기 외화 차입선을 거둘 것이고, 갚을 날은 당겨지고, 보유고는 더 빨리 영(零)을 향할 것이다. 등급이라는 한 숫자가 내려가면, 갚지 못할 외채가 그만큼 무거워진다. 기록이 한쪽을 내리고, 그 내림이 다른 쪽을 무너뜨린다.

부팅 화면의 그 사훈이, 청하지 않아도 떠올랐다.

NUMERUS NON MENTITUR

등급도 숫자다. 거짓말하지 않는다. 내일의 강등은 참이다 — 아직 발표되지 않았을 뿐. 평가사가 그것을 발표하든 안 하든, 등급은 이미 내려가 있었다. 발표는, 이미 일어난 하강을 뒤늦게 종이에 옮기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통지서의 등급 칸을 분절된 눈으로 읽었다. 기호들이 따로 도착했다. 그리고 따로 도착한 기호들 사이, 본래는 아무것도 없어야 할 틈에, 다음 기호가 보였다. 통째로 읽는 눈에는 보이지 않던 것.

A · ↓ · B · B · B · ↓ · B · B · ↓ · …

강등은 한 단계에서 멈추지 않았다. 칸과 칸 사이로, 등급은 계속 내려갔다. 투자 적격을 지나, 투기 등급을 지나, 부도(D)에 이르렀다. 거기서 멈춰야 했다. 부도는 등급의 바닥이므로. 그러나 부도 아래, 본래는 아무 등급도 없어야 할 그 틈에, 기호가 더 있었다. 등급이 아닌 기호. 어떤 평가사도 매기지 않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칸들.

D · ↓ · ██ · ↓ · ████ · ↓ · ██████.

측량기수의 갱이 마흔여덟 길에서 멈추지 않고 더 깊어졌듯이. 등급은 부도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내려갔다. 잴수록 깊어지는 갱처럼, 읽을수록 더 내려가는 등급. 나는 그 하강의 맨 아래를 읽으려, 통지서를 등불에 가까이 댔다. 맨 아래 칸에는 등급 대신, 한 날짜가 적혀 있었다.

통지서 하단의 '다음 등급 검토 예정일' 칸이었다. 평가사가 다음에 이 회사를 다시 들여다볼 날.

십이월 · ██ · 일.

십이월의 그 하루. 보유고가 영에 닿는 날. 전임자의 필름이 자릿수 사이에 적어 둔 날. 인사 카드의 빈 면직 일자. 그리고 이제, 평가사가 회사를 다시 들여다볼 날. 그날, 등급은 부도 아래 그 이름 없는 칸까지 내려가 있을 것이다. 그날, 회사는 갚지 못하고, 보유고는 비고, 나는 면직된다.

나는 통지서를 내려놓았다. 등급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회사는 내일 강등되고, 그 강등은 칸 사이로 끝없이 이어져, 십이월의 그 하루에 바닥 아닌 바닥에 닿는다. 부도 아래에는 등급이 없으나, 빈 자리가 있고, 빈 자리에는 날짜가 있었다.

그 날짜를 적은 손은, 시재표를 인쇄한 손과 같았다. 누르지 않은 내 단말의 손. 그리고 네 묶음의 표지에 같은 한 줄을 찍은, 그 손.

단말이 내일을 인쇄하고 등급이 부도 아래로 내려간 뒤에도, 회사는 내게 다음 일을 시켰다. 이번에는 환율이었다.

자금부는 매일 오전 아홉 시 반과 오후 세 시, 외국환은행이 고시하는 원/달러 환율을 자료실 장부에 옮겨 적게 했다. 받아 적기. 내가 가장 잘하는, 그리고 이제는 가장 두려워하는 일. 나는 오전 고시를 적었다. 한 달러에 구백몇 원. 펜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을 때, 같은 칸의 숫자가 조금 커져 있었다. 오후 고시는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처음에는 손이 떨려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 떨림의 정체를 안다. 적힌 수는 적힌 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는다. 외채가 그러했고, 시재가 그러했고, 등급이 그러했다. 환율도 그러했다. 다만 환율은 — 되돌아온다는 점이 달랐다. 외채는 한 방향으로 자랐다. 환율은 밀물처럼 차올랐다가 잠깐 빠지고, 다시 차오를 때는 먼젓번보다 한 뼘 더 높이 올라왔다.

나는 분절된 눈으로 오전과 오후 고시 사이를 읽었다. 두 개의 공식 숫자 사이, 본래 아무것도 없어야 할 그 틈에, 고시되지 않은 중간 값들이 늘어서 있었다. 차오르고, 빠지고, 더 높이 차오르고. 하루에 두 번 고시되는 환율의 칸 사이에서, 나는 열세 번의 들고남을 셌다.

밀물과 썰물.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알았다. 상자의 두 번째 묶음 — 등대수의 일지였다.

물때는 하루 두 번이라 배웠다. 그러나 내가 등을 켜고 세기 시작한 날부터, 물은 두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세는 만큼 들었다. 열세 번을 세고 나니 열네 번째 물때가 장부의 다음 칸을 비워 두고 나를 기다렸다. 그래서 나는 그 칸에 열네 번째 물때를 내 손으로 그려 넣었다.

등대수 윤상학. 그는 물때를 세다가, 세는 행위가 물때를 늘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빈 칸을 견디지 못해 열네 번째를 제 손으로 적었다. 그가 적은 그 물때는 빠지지 않았다. 그는 그 물 아래로 등을 들고 내려갔다.

환율도 물때였다. 고시될 때마다 한 번의 들고남.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장부에 옮겨 적을 때마다, 다음 들고남은 먼젓번보다 높이 차올랐다. 받아 적는 손이 수위를 올리고 있었다. 등대수가 등을 켜 물을 늘렸듯이, 나는 펜을 들어 환(換)을 늘리고 있었다. 고정 환율이라는 둑은 그래서 무너졌다. 적는 한, 환율은 고정될 수 없다. 받아 적기가 곧 차오름이므로.

평가 단말의 사훈 아래, 다른 한 줄이 등대 도면에 있었다고 묶음은 적었다.

LUMEN SUPER ABYSSUM CUSTODIT

빛을 심연 위에 지킨다. 등대의 일이란 심연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빛 하나를 떠 있게 하는 것. 그러나 빛을 켜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는, 들여다보는 만큼 심연을 깊게 한다. 환율에는 바닥이 없었다. 등급이 부도 아래로 내려갔듯, 원화는 어떤 둑 아래로도 내려갈 수 있었다. 나는 그 심연 위에 펜이라는 작은 빛을 들고 있었고, 그 빛이 비추는 만큼 바닥은 멀어졌다.

나는 내일 자, 십일월 이십일의 오전 고시를 적기 위해 새 칸에 펜을 댔다. 그러나 그 칸은 비어 있지 않았다. 거기 이미 한 수가 적혀 있었다 — 내 글씨로. 둑이라 부를 만한 어떤 선보다 한참 위, 원화가 더는 화폐가 아니게 되는 자리의 숫자. 그 옆에는 작은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빠지지 않는 물때를 표시할 때 등대수가 쓰던, 열네 번째 물때의 표지(標識)였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 칸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