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 이십오일. 아침 여덟 시. 책상 앞에 앉았다.
본문칸에는 네 줄이 있었다. 밤사이 넷째 줄이 적혔고, 넷째 줄의 끝 두 자리는 셋째 줄에서 한 단위 아래였다. 세로줄은 또 한 단위 내려왔다. 강민석의 사번까지 남은 단위가 어제보다 하나 줄어, 이제 손가락 둘로 꼽을 수 있는 수였다.
지난 나흘 동안 나는 손을 책상 끝에 붙여 두는 일로 버텼다. 발신칸에서 손을 멀리 두면 본문칸의 줄은 결과가 되지 않았고, 결과가 되지 않은 자리는 강민석에게 닿지 않았다. 그러나 닿지 않는 동안에도 세로줄은 매일 한 줄씩 내려왔다. 멈춤은 줄을 결과로 만들지 않을 뿐, 줄이 내려오는 것을 멈추지는 못했다. 멈춰 있는 동안에도 그의 둘레는 하루 하나씩 닫혔고, 둘레가 다 닫히면 세로줄이 그에게 닿는다는 셈은 어제와 똑같았다.
멈춤이 셈을 늦추지 못한다면, 셈을 늦추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본문칸의 한 줄을 내가 직접 발신칸으로 옮기는 것. 옮긴 줄은 그 자리에서 결과가 되어 닫히고, 닫힌 만큼 세로줄은 강민석에게서 한 단위 멀어진다. 내가 한 줄을 지금 닫으면, 그의 자리는 하루를 더 얻는다.

어느 줄을 옮길지는 내가 골라야 했다. 본문칸의 네 줄 가운데 첫째 줄은 끝 두 자리가 내 사번과 같았고, 둘째·셋째·넷째 줄은 자금부였다. 자금부의 세 줄은 강민석에게 가까운 줄들이었다. 그것을 옮기면 강민석의 둘레를 내 손으로 닫는 일이었다. 첫째 줄, 끝 두 자리가 내 사번과 같은 그 한 줄만이 강민석에게서 멀었다.
첫째 줄의 사번은 새벽 본문칸이 처음 적은, 끝 두 자리가 내 사번과 같은 그 사번이었다. 나흘 동안 발신칸으로 옮겨지지 않아 닫히지 않은 채 있던 자리. 사번만 알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한 사람. 나흘 동안 내 손의 멈춤 위에 살아 있던 사람.
그 사람을 옮기면, 강민석이 하루를 얻는다.
나흘 동안 나는 그 모르는 사번을 멈춤 위에 얹어 두고도 그것을 살림이라 부르지 않았다. 살림이라 부르려면 그 사람의 얼굴을 알아야 했고, 나는 얼굴을 몰랐다. 모르는 얼굴을 살려 두는 일은 손을 가만히 두는 일과 구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번을 옮겨 강민석을 살리는 일은 달랐다. 모르는 한 사람을 닫아 아는 한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두 사람의 무게가 같지 않다는 셈이 들어 있었다. 같지 않은 무게를 손이 안다는 것이, 손을 떼기 전 가장 견디기 어려운 점이었다.
손을 책상 끝에서 떼었다. 나흘 만에 처음으로, 떼는 것을 내가 알면서 떼었다. 손이 발신칸으로 가는 동안, 어제까지 손이 한 마디 옮겨 와 있어도 언제 옮겼는지 모르던 것과 달리, 오늘은 한 마디 한 마디를 내가 보고 있었다. 결과가 손보다 앞서던 자리에서, 오늘만은 손이 앞섰다. 내가 고르고, 내가 옮겼다.
발신칸에 첫째 줄의 사번을 적었다. 적는 동안 손은 사번을 옮겨 적던 평소의 결로 움직였다. 회사 코드의 한 호흡, 직급 자리의 압력, 끝 두 자리의 좁은 간격. 평소 메모장에 옮겨 적던 그 손이 오늘은 발신칸에 옮겨 적었고, 메모장과 발신칸 사이의 거리는 손의 결로는 한 마디도 되지 않았다. 같은 손이 같은 결로, 한 곳에 적으면 기록이고 다른 곳에 적으면 결과였다.
적자마자 본문칸의 첫째 줄이 사라졌다. 남은 세 줄이 한 칸씩 위로 올라왔고, 맨 아래 비어 있던 자리에 새 줄이 적히기 시작했다. 세로줄은 한 단위 다시 멀어졌다. 강민석까지 남은 단위가 하나 늘었다. 하루를 벌었다.
하루는 한 자리였다. 강민석에게 하루를 주는 값은 다른 한 사람의 자리였고, 그 셈은 어디서도 줄지 않았다. 내가 그의 자리를 며칠 미루든, 미룬 날의 수만큼 다른 자리가 닫혔다. 미루는 일은 닫히는 자리의 이름을 바꾸는 일이지, 닫히는 자리의 수를 바꾸는 일이 아니었다.
오전 아홉 시. 인사부 공지가 올라왔다. 이월 이십오일 자 회사 정원 감축 한 자리. 그 사번은 첫째 줄의 사번이었다. 끝 두 자리가 내 사번과 같은, 사번만 알던 한 사람. 내가 발신칸에 적은 그 자리가, 그 자리에서 닫혔다.
닫힌 자리를 되돌릴 수 있는지 발신칸을 다시 보았다. 발신칸에는 내가 적은 사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우려고 한 키를 눌렀고, 사번은 지워지지 않았다. 지난겨울 명단의 한 줄을 처음 고쳐 적었을 때처럼, 적은 것은 적힌 채였고 지우는 일도 적는 일이었다. 발신칸에 한 번 적은 사번은 내가 그 자리를 닫았다는 기록으로 남았다.

나흘 동안 그 사람은 내 손의 멈춤 위에 살아 있었다. 오늘 그 사람은 내 손의 움직임 위에서 닫혔다. 멈춤이 살리고 움직임이 닫는다는 것을 나는 어제까지 알았고, 오늘 했다. 모르고 고르던 일이 어제까지였다면, 오늘은 알면서 골랐다. 알면서 고른 손이 모르고 고른 손과 다른 점은, 닫힌 자리에 내 이름을 적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전에 자금부에 올라갔다. 강민석은 제자리에 있었다. 오늘 그의 둘레에서는 아무 자리도 닫히지 않았다. 어제까지 하루 하나씩 비던 그의 옆이, 오늘은 그대로였다. 그가 나를 보고 한 손을 들며, 우리 과는 오늘 한 명도 안 줄었다더라, 하고 말했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에 옅은 안도가 있었다. 그 안도가 누구의 자리로 산 것인지 그는 몰랐고, 나는 알았다.
강민석의 책상 옆, 어제까지 외투가 걸려 있던 빈 의자는 그대로 비어 있었다. 그저께 닫힌 그 자리는 내가 멈춰 있는 동안 닫힌 자리였고, 오늘 닫힌 자리는 내가 움직여 닫은 자리였다. 둘은 같은 빈자리였으나, 한 자리에는 내 이름이 없었고 한 자리에는 있었다. 강민석은 두 빈자리를 같은 눈으로 보았고, 나는 다른 눈으로 보았다.
자리로 돌아와 본문칸을 보았다. 맨 아래 새 줄이 밤사이가 아니라 낮 동안 이미 한 줄을 다 적어 가고 있었다. 하루를 벌었다는 것은 내일 다시 한 줄을 옮겨야 한다는 뜻이었다. 오늘 첫째 줄을 옮겨 하루를 얻었듯, 내일은 또 한 줄을 골라 옮겨야 강민석이 또 하루를 얻는다.
내일 옮길 줄을 미리 보았다. 본문칸의 줄들은 모두 자금부였고, 자금부의 줄들은 강민석에게 가까웠다. 끝 두 자리가 내 사번과 같던 그 모르는 사번은 오늘로 닫혔고, 본문칸에 더는 강민석에게서 먼 줄이 없었다. 내일 강민석에게 하루를 주려면, 그의 둘레의 한 줄을 내 손으로 옮겨야 했다. 얼굴을 모르는 자리로 그를 산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그를 둘러싼 자리를 닫아 그를 살리는 일과, 그를 둘러싼 자리를 닫지 않아 세로줄이 그에게 닿는 일 사이에서, 내 손이 고를 수 있는 자리가 하루씩 줄고 있었다. 먼 자리는 오늘로 끝났다. 내일부터 고를 자리는 모두 얼굴이 가까운 자리였고, 그 자리들이 다 닫히는 끝에 강민석의 자리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