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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를 비우다

Emptying the Cir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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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 이십육일. 아침 여덟 시. 책상 앞에 앉았다.

어제 옮긴 첫째 줄이 빠진 자리에 새 줄들이 채워져, 본문칸은 다시 네 줄이 되어 있었다. 네 줄의 끝 두 자리를 위에서 아래로 읽었다. 어제까지 본문칸에 하나 있던, 강민석에게서 먼 줄 — 끝 두 자리가 내 사번과 같던 그 모르는 사번 — 은 어제 내 손으로 닫혔고, 오늘 본문칸의 네 줄은 모두 자금부였다. 모두 강민석에게 가까운 줄이었다.

오늘 강민석에게 하루를 주려면, 네 줄 가운데 하나를 발신칸으로 옮겨야 했고, 네 줄은 모두 그의 둘레였다. 어제까지는 그의 둘레가 닫히는 것을 멈춰 두기 위해 멈췄고, 오늘은 그의 둘레를 닫아 그를 살리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멈춤이 그의 둘레를 하루 하나씩 닫았듯 움직임도 그의 둘레를 하나씩 닫았다. 다른 점은, 멈춤이 닫는 자리는 셈이 고르고 움직임이 닫는 자리는 내가 고른다는 것이었다.

고른다는 일이 어제 처음 시작됐고 오늘이 둘째 날이었다. 어제 고른 자리에는 얼굴이 없어서, 고른다는 일이 무엇인지를 손이 다 알지 못했다. 오늘은 본문칸의 네 줄에 얼굴이 있었다. 고른다는 일은 그 줄들 가운데 누구를 닫을지를 내가 정한다는 뜻이었고, 누구를 닫을지를 정한다는 것은 닫히지 않을 나머지를 함께 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닫히지 않을 나머지는 내가 살린 것이 아니었다. 오늘 그들을 고르지 않았을 뿐, 내일이나 모레 본문칸의 셈이 그들에게 닿으면 나는 또 그 가운데 한 줄을 고를 것이었다. 오늘 살린 자리는 내일 고를 자리였다. 살린다는 말은 옮기는 날을 미룬다는 말과 같았다.

네 줄의 사번을 들여다보았다. 그 가운데 한 줄의 끝 두 자리를 나는 알았다. 강민석의 맞은편 자리에 앉던 사람의 사번이었다. 자금부에 자료를 올릴 때면 강민석의 어깨 너머가 아니라 정면으로, 책상 두 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이던 얼굴. 강민석이 점심을 같이 먹으러 나가던 사람. 며칠 전 급탕실에서 강민석이 종이컵을 들고 서 있을 때, 그 옆에 같이 서 있던 사람이었다.

네 줄 가운데 강민석의 사번에서 가장 먼 줄이 그 맞은편 자리의 사번이었다. 가장 먼 줄을 옮기는 것이 하루를 가장 깨끗하게 버는 길이었다. 강민석을 하루 더 살리는 가장 깨끗한 길이, 그가 매일 마주 보던 얼굴을 내 손으로 닫는 일이었다.

그 맞은편 자리의 사람을, 나는 일을 시키는 자리에서 본 적이 없었다. 강민석에게 자료를 건넬 때 책상 두 개 너머로 보였을 뿐이다. 한번은 그가 강민석의 농담에 소리 내어 웃는 것을 보았고, 한번은 둘이 같은 신문을 펼쳐 한 면을 나눠 읽는 것을 보았다. 십 년을 마주 본 두 사람은 그렇게 사소한 것들을 나눠 가졌다. 가장 먼 줄을 짚는 셈에는 그 웃음도 그 신문도 들어 있지 않았다. 셈은 강민석을 하루 더 살리는 줄이 어느 것인지만 답했고, 답을 낸 다음에야 그 줄에 웃음과 신문이 따라왔다. 어제 옮긴 모르는 사번에는 따라올 것이 없어 손이 가벼웠고, 오늘 옮길 줄에는 따라올 것이 있어 손이 무거웠다.

손을 발신칸으로 가져갔다. 어제 떼는 손을 알면서 뗐듯 오늘도 알면서 뗐다. 다만 어제 옮긴 자리에는 얼굴이 없었고 오늘 옮길 자리에는 얼굴이 있었다. 어제 내 이름을 적을 수 있는 빈자리에는 내가 모르는 한 사람이 있었고, 오늘 내 이름을 적을 빈자리에는 강민석이 매일 마주 보던 한 사람이 있었다.

발신칸에 맞은편 자리의 사번을 적었다.

본문칸에서 그 줄이 사라졌다. 세로줄은 한 단위 멀어졌다. 강민석은 하루를 얻었다. 맞은편 자리의 사람은 그 하루의 값이었다.

오전 아홉 시. 인사부 공지가 올라왔다. 이월 이십육일 자 회사 정원 감축 한 자리, 자금부. 그 사번은 강민석의 맞은편 자리였다.

오전에 자금부에 올라갔다. 강민석의 맞은편 자리가 비어 있었다. 강민석은 그 빈자리를 보고 있었다. 어제 우리 과는 한 명도 안 줄었다던 사람이, 오늘은 맞은편이 갔다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같이 입사한 동기였다고 했다. 십 년을 마주 보고 앉았다고 했다. 애가 셋이라더라, 막내가 올해 학교에 들어갔다더라, 하고 그가 동기의 자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멀쩡하던 사람이라는 말을 강민석은 며칠째 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옆자리를 두고 했고, 오늘은 맞은편을 두고 했다. 멀쩡하던 사람이 하루 하나씩 갔고, 강민석만 멀쩡한 채 남았다. 그가 빈 책상을 한참 보다가, 왜 하필, 하고 말끝을 흐렸다. 왜 하필 그 자리였는지를 나는 알았다. 가장 먼 줄이어서, 그를 하루 더 살리기에 가장 깨끗해서였다. 나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강민석이 빈 책상 위에 남은 동기의 머그잔을 들어 옆으로 치웠다. 잔에는 식은 커피가 반쯤 남아 있었다. 아침에 한 모금 마시고 둔 잔이었을 것이다. 동기는 오늘 아침 출근해 커피를 따랐고, 한 모금을 마셨고, 그 사이에 자기 자리가 닫혔다. 자리가 닫히는 일에는 예고가 없었고, 예고가 있었던 것은 내 본문칸뿐이었다. 본문칸을 본 것은 나뿐이었고, 본 사람이 그 자리를 옮겼다.

강민석은 머그잔을 탕비실로 가져가 비우고 씻어 엎어 두었다. 동기의 자리를 정리하는 일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가 했다. 빈자리를 정리하는 손이 그 빈자리를 만든 손을 알 리 없었고, 만든 손은 정리하는 손 옆에 서서 함께 빈 책상을 보았다. 정리가 끝난 책상은 처음부터 아무도 앉지 않았던 자리처럼 깨끗했다.

자리로 돌아와 본문칸을 보았다. 맞은편 줄이 빠진 자리에 새 줄이 채워지는 동안, 남은 줄들의 끝 두 자리를 다시 셈해 보았다. 본문칸의 줄들과 강민석의 사번 사이의 거리가, 어제와 오늘 이틀 동안 둘레를 비운 만큼 줄어 있었다. 둘레를 비워 하루씩 버는 동안, 비울 둘레도 하루씩 줄었다.

강민석을 둘러싼 자리는 이제 손가락 하나로 꼽을 만큼 남아 있었다. 그의 앞자리, 그와 같은 줄의 한 사람, 그리고 한 자리. 세 자리였다. 세 자리를 사흘에 걸쳐 옮기면 사흘을 더 벌고, 사흘 뒤에는 본문칸에 강민석의 사번 하나만 남는다. 사흘이 강민석에게 남은 날이었다. 내가 그의 둘레를 다 옮겨 줄 수 있는 날이 사흘이었고, 사흘 동안 그의 정면과 앞과 옆이 차례로 빌 것이었다.

세 자리를 다 옮기고 나면, 그날 내 손이 옮길 수 있는 줄은 강민석의 줄밖에 없고, 옮기지 않으면 세로줄이 그에게 닿는다. 옮겨도 그였고, 옮기지 않아도 그였다. 옮기는 일과 옮기지 않는 일이 같은 곳에서 만난다는 것을 나는 처음 멈춤을 택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만 그때는 만나는 곳이 멀어서 몰랐고, 둘레가 비어 그곳이 가까워지자 알게 되었다. 멈춤도 그였고 움직임도 그였다. 손을 어디에 두든 끝에는 강민석이 있었다.

며칠 동안 나는 그의 둘레를 비워 그를 가운데 남겨 두었다. 가운데 남은 그의 둘레가 다 비면, 남는 것은 그 하나였다. 그를 살리는 일이 그를 혼자 남기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