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는 이의 첫 글자가 내 성이라는 것을 안 뒤에도, 나는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멈춤이 길이 아님은 이미 십일월에 배웠다. 순서대로 읽으라 했으니, 나는 네 묶음 중 등대수의 물때표를 먼저 폈다. 가장 오래된 것은 1923년 측량기수의 갱 일지였지만, 등대수를 먼저 든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 위층에서 벌어지는 일이 물때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등대수의 물때표는 1934년 황해 어느 무인도 등대의 것이었다. 첫 장의 표어 — 물은 같은 자리에 두 번 들지 않는다 — 아래로, 그는 매일의 만조와 간조를 적었다. 인쇄된 물때표가 있었는데도 제 손으로 따로 적었다. 그리고 어느 줄부터, 인쇄된 표에 없는 물때가 그의 손글씨로 끼어들었다. 달도 없는 밤에 드는 열세 번째 물때. 그는 그것을 처음엔 오기로 여겼고, 다음엔 제 눈을 의심했고, 마침내 그것에 맞추어 등불을 들고 갯벌로 내려섰다. 물이 빠진 자리는 인쇄된 어느 표도 허락하지 않는 데까지 이어졌다고, 그의 마지막 온전한 줄은 적고 있었다.
물때표를 옮겨 적으며, 나는 한 가지를 알아챘다. 그의 조수는 되풀이되었으나, 같은 높이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들 때마다 조금씩 더 높이, 빠질 때마다 조금씩 더 멀리. 표어는 거짓이 아니었다. 물은 같은 자리에 두 번 들지 않았다 — 매번 한 뼘씩 더 들어왔으니까. 되풀이는 정지가 아니라 증식의 다른 이름이었다. 측량기수의 갱이 잴 때마다 깊어졌듯, 등대수의 물은 들 때마다 높아졌다. 같은 법칙의 다른 얼굴. 잰 자에게는 깊이로, 본 자에게는 높이로.

그리고 나는 위층을 생각했다.
이틀 전, 아홉 회사가 멈췄다. 어제 또 몇이 멈췄다. 영업정지는 무작위로 떨어지지 않았다. 한 곳에서 다음 곳으로 옮아갔다 — 자금을 빌려주고 빌리는 줄을 따라, 한 회사의 간조가 옆 회사의 간조를 불렀다. 물때처럼. 나는 자료실의 거래 원장을 폈다. 어느 종금사가 어느 종금사에 단기로 물려 있는지, 콜자금이 어느 줄로 도는지. 그 줄들을 따라가자, 나는 다음에 빠질 자리를 짚을 수 있었다. 등대수가 인쇄된 표에 없는 다음 물때를 짚었듯이. 그리고 그것은, 들 때마다 높아지는 물처럼, 갈수록 더 깊은 간조였다.
나는 내 정리 노트에 다음 간조의 날짜를 적었다. 옮아가는 리듬으로 계산한, 다음에 멈출 회사와 그 날짜. 손이 떨렸다. 열세 번째 물때를 처음 적었을 때 등대지기의 손이 떨렸을 것처럼. 적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미 '우리'였고, '우리'의 일은 적는 것이었다. 보는 일과 적는 일은, 끝까지 읽은 자에게는 같은 일이었다.
다 적고 나서, 나는 등대수의 물때표로 눈을 돌렸다. 마지막 온전한 줄 아래, 전에는 비어 있던 칸에 한 줄이 와 적혀 있었다. 열네 번째 물때. 날짜가 붙어 있었다. 1934년의 어느 날이 아니라 — 내가 방금 노트에 적은 그 날짜, 다가오는 십이월의 그 날이었다. 예순세 해 전 황해의 등대지기가, 1997년 십이월의 간조를 제 손글씨로 미리 적어 두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짚기를 기다리며.
물은 같은 자리에 두 번 들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물때는, 예순세 해를 건너 두 번 적힌다. 한 번은 그의 손으로, 한 번은 나의 손으로.
등대수 다음은 측량기수였다. 네 묶음 중 가장 오래된 것. 1923년 강원도 산중의 한 탄광, 수직갱의 깊이를 재던 측량기수의 일지였다. 나는 지난가을 이미 그의 갱을 읽었다. 잴 때마다 한 길씩 깊어지는 바닥. 그러나 그때는 겁먹은 채, 내 외채 장부와 그의 갱이 닮았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았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끝까지, 순서대로 읽었다.
측량기수의 일지 표지에는 정으로 새긴 라틴어가 있었다. 그의 측량기계에 박혀 있던, 그리고 일흔네 해 뒤 신용평가 단말의 부팅 화면에서 내가 다시 읽은 그 문장.
NUMERUS NON MENTITUR.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는 수직갱에 다림줄을 내려 깊이를 쟀고, 잴 때마다 다림줄은 전날보다 한 길 더 깊은 바닥에 닿았다. 광무국의 인쇄된 대장에는 갱의 깊이가 고정되어 있었는데도, 그는 제 손으로 따로 쟀고, 제 손의 숫자가 대장보다 깊었다. 그리고 어느 줄부터, 닿아서는 안 될 깊이에 닿기 시작했다.
등대수의 물이 들 때마다 높아졌듯, 측량기수의 갱은 잴 때마다 깊어졌다. 높이와 깊이. 같은 법칙의 두 방향. 어제는 물때로 읽었고 오늘은 깊이로 읽는, 한 법칙. 나는 그 둘 사이에 내 장부를 놓았다. 단기 외화 차입. 옮겨 적을 때마다 불어나는 잔액. 그것은 등대수의 물처럼 차오르는 부채였고, 측량기수의 갱처럼 깊어지는 구멍이었다. 갚아야 할 것은 차오르고, 갚을 자리는 깊어졌다. 외환보유고가 그 깊이를 향해, 다림줄처럼 곧게 내려가고 있었다.

측량기수의 마지막 측심 기록을 옮겨 적으려다, 나는 멈췄다.
그의 마지막 온전한 줄 아래, 어제 등대수의 물때표가 그랬듯, 전에 없던 한 줄이 와 있었다. 새 측심. 날짜와 깊이. 1923년의 어느 날이 아니었다. 다가오는 십이월의 그 날 — 어제 등대수의 물때표가 가리킨 바로 그 간조의 날이었다. 그리고 깊이 칸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내가 매일 옮겨 적던 숫자. 우리나라가 갚아야 할 단기 외채의 총액. 한 광부의 다림줄이, 일흔네 해 뒤 한 나라의 빚의 깊이를 미리 재어 두고 있었다. 단위만 길에서 달러로 바뀐 채, 같은 깊이를.
다림줄은 닿아서는 안 될 깊이에 닿는다. 측량기수의 마지막 문장은 거기서 끊겨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끊긴 문장의 다음을 알았다. 사흘 전 등대수의 끊긴 문장이 그랬듯, 측량기수의 갱도 다섯 번째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닿아서는 안 될 깊이에 다림줄을 내리는 일을, 이제 내가 이어받을 차례였다. 단기 외화 차입 원장의, 다음 빈 줄에서.
측량기수 다음은 사서였다. 1924년, 미스카토닉 대학 도서관, 청동 자물쇠가 달린 가죽 일기. 사라진 던컨 학장의 기록. 네 묶음 중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다른 셋은 무엇을 재거나 보거나 들었지만, 이것은 읽기 자체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첫 장에 던컨 신부의 경고가 있었다. 더 이상 읽지 마십시오. 나는 그 경고를 지난가을 이미 어겼다. 십일월에 첫 묶음을 끝까지 읽었고, 그 위로 분절이 번지기 시작했다. 음절이 따로 도착하는 병. 그러니 지금 그 경고를 다시 읽는 나는, 경고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어긴 자였다. 경고는 어기기 전 사람을 위한 것이고, 나는 어긴 뒤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작정하고 읽으니 달랐다. 처음엔 음절이 따로 도착했다면, 이제는 문장이 따로 도착했다. 던컨의 경고를 끝까지 읽어 내리는데, 글자들이 제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다시 모였다. 여섯 음절이 내 분절된 눈 위에서 흩어졌다가, 다른 순서로 앉았다.
읽 는 이 여 더 멀 리나는 알았다. 다른 셋은 현상이었다. 깊어지는 갱, 차오르는 물, 내일 자 전문. 그러나 사서의 일지는 현상이 아니라 기관(機關)이었다. 재고 보고 듣는 일이 그것들을 키웠다면, 읽는 일은 그 모두를 잇는 손이었다. 던컨은 가장 먼저 안 사람이었다. 주의(注意)를 기울이는 행위 자체가 기관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적었다. 더 이상 읽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적음으로써, 다음 독자가 읽도록 남겼다. 경고는 금지인 동시에 인계였다. 그도 끝까지 읽었으므로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나처럼.
읽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춤은 길이 아니었고, 나는 이미 다섯 번째 손이었다. 다만 이제, 무엇을 읽고 있는지 알았다. 갱도 물도 전문도 아니었다. 나는 읽는 일을 읽고 있었다. 법칙을 키우는 그 손을, 그 손이 든 채로.
일기의 마지막 줄에서, 던컨의 글씨는 처음 읽었을 때와 그대로였다 — 이 글을 읽는 우리를 향한 마지막 문장. 그러나 분절된 눈으로 다시 읽자, '우리'라는 한 단어가 갈라졌다. 그 사이, 전에는 없던 자리에, 한 이름의 첫 글자가 앉아 있었다. ㄱ. 받는 이 없는 상자의 표지에서 본 그 글자. 던컨의 '우리'는, 예순세 해를 건너, 나를 한 자(字)씩 받아 적고 있었다. 읽는 이여, 더 멀리. 경고가 아니라, 부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