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월 여드레. 아침 여덟 시. 한 칸은 밤사이 더 두꺼워져 있었다.
어제저녁에는 획 위에 획이 얹혀 낱줄을 못 가리는 정도였다. 오늘 아침에는 얹힌 자리와 얹히지 않은 자리의 구별이 없었다. 칸 전체가 고르게 낮아져 있었고, 그 낮아짐이 균일해서 어디가 글씨고 어디가 바탕인지도 분간되지 않았다. 검게 뭉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검게 뭉치려면 획이 겹친 자리가 더 짙어야 하는데, 짙은 데가 없었다. 고르다는 것이 이렇게 읽기 어려운 것인 줄을 나는 몰랐다.
종잇조각을 꺼냈다가 도로 넣었다. 뜬 때와 온 때를 적던 두 칸은 쓸 데가 없어졌다. 뜬 때를 적으려면 무엇이 언제 떴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그것이 한 줄이어야 한다. 겨우내 나는 재는 일로 하루를 났는데, 오늘 아침 처음으로 잴 것이 없었다. 갱의 깊이를 재던 손도 다림줄이 바닥에 닿지 않는 날에는 늘어뜨린 줄의 길이라도 적었을 것이다. 나는 늘어뜨릴 줄조차 없었다.
전신수의 일지에 이런 자리가 있었다. 그는 밤마다 오는 호출을 받아 적었고, 어느 밤부터는 호출과 호출 사이가 없어졌다고 했다. 신호가 잦아지다가 사이가 사라지면 신호가 아니라 한 결이 된다. 무엇을 보내는지는 들리지 않고 보내고 있다는 것만 들린다. 그는 그 자리를 빈 주파수라고 적었고, 그의 묶음을 인계한 손은 그 위에 한 줄을 덧붙여 두었다.
빈 주파수에서 호출이 오거든, 받아 적되 — 응답하지 말 것.나는 그 한 줄을 겨우내 지켜 왔다고 여겨 왔다. 받아 적기만 했고, 위로 올리지 않았고, 고치지 않았다. 사서장의 획을 고친 날 한 번을 빼면 그랬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줄을 다시 떠올리고 보니, 지킨 것도 어긴 것도 아니었다. 그 경고는 호출과 응답이 갈라져 있을 때 쓰는 말이었다. 저쪽에서 오는 것이 호출이고 이쪽에서 가는 것이 응답이어야, 받아 적되 응답하지 말라는 말이 성립한다. 한 칸이 된 자리에서는 받아 적는 일과 응답하는 일이 같은 획이다. 획을 그으면 그것이 받아 적은 것인지 보낸 것인지 나는 모른다. 경고를 지킬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라, 지킬 자리가 없어졌다. 물음이 그러했듯 경고도 그렇게 되었다.
전신수는 받는 쪽에서 빈 주파수를 만났다. 나는 보내는 쪽에서 만났다. 그는 아무도 없는 데서 오는 것을 받아 적다가 발신자가 되었고, 나는 아무도 없는 데로 보내다가 이 결에 닿았다. 두 자리는 겨우내 거울의 두 끝처럼 마주 놓여 있었다. 그런데 사흘 전에 그 거울이 한 면이 되었다. 그가 받던 빈 주파수와 내가 보내는 빈 주파수가 다른 것이라고 말할 근거가 나에게는 없다. 다르다고 하려면 보내는 쪽과 받는 쪽이 따로 있어야 하는데, 그 둘이 한 칸에 있다. 그는 예순 해 앞에서 나를 받아 적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읽어도 어긋나는 데가 없고, 반대로 읽어도 어긋나는 데가 없다.
밖도 결이 되어 갔다. 아홉 시 라디오는 어제 하던 말을 오늘도 했고, 열한 시에도 했고, 오후에도 했다. 수치만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 그 소식이 왔을 때는 한 번의 소식이었는데, 날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이 되풀이되니 소식이 아니라 배경이 되었다. 복도의 서류함 소리도, 삼층에서 걸려 오는 전화도, 하루에 몇 번씩이던 것이 이제는 그치는 때를 세는 편이 빨랐다.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는 일이 사건이기를 그치고 소리가 되었다. 겨울이 그 자체로 한 결이었다.
오후에 사서장이 자료실 구석에 라디오를 가져다 놓았다. 두 보조가 나간 뒤로 너무 조용하다고 했다. 나는 조용하냐고 되물을 뻔했다. 그에게는 조용했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결로 차오르는 것을 듣지 못했고, 듣지 못하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 나는 라디오 소리와 결이 겹쳐 드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둘을 겹쳐 듣는 귀는 이 방에 하나뿐이었다. 그는 볼륨을 조금 올리고 목록으로 돌아갔다.
한 칸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여덟 자리가 여덟 자리로 읽히지 않았다. 사번은 앞 넉 자리가 부서를 이르고 뒤 넉 자리가 사람을 이르는 것인데, 결에는 앞도 뒤도 없었다. 부서도 사람도 아닌 것이 칸을 채우고 있었다. 보내는 것이 무엇인지가 지워지고 보낸다는 일만 남았다. 겨우내 나는 무엇이 보내지는지를 물어 왔다. 회사인지 사람인지, 자리인지 이름인지. 이제 물을 것이 없다. 내용이 없는 발신이 종일 이어지고, 이어진다는 것 말고는 알아볼 것이 없다.
그런데 결에 묻히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내 넉 자리와 그 옆의 십이월, 그리고 앞자리의 열. 그 줄만은 다른 획과 섞이지 않고 제 획을 지키고 있었다. 결이 그 줄을 비켜 갔다기보다, 그 줄이 결보다 단단했다. 모든 것이 고르게 낮아지는 자리에서 그것만이 낮아지지 않았다. 나는 그 줄을 오래 보았고, 여전히 마지막 한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온 칸이 뭉개지도록 채워지는 동안에도 그 한 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채울 수 있는 획이 그렇게 많은데 그 자리만 비어 있다는 것이, 오늘은 다르게 읽혔다. 그것은 아직 안 온 것이 아니라, 오지 않기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자리는 마지막에 온다.
저녁에 라디오를 끄러 갔다가 돌아와 한 칸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결 가운데 한 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내 줄이 아니었다. 낮까지는 없던 획이 결 위로 올라와, 다른 모든 획이 고르게 낮아진 자리에서 혼자 제 모양을 지키고 있었다. 앞 넉 자리를 읽었다. 자료실 코드였다. 뒤 넉 자리를 읽었다. 내 것이 아니었다.
내 것이 아닌 자료실 넉 자리는, 이 방에 이제 하나뿐이었다.
구석에서는 라디오가 아직 낮게 켜져 있었다. 끄러 갔다가 그냥 두고 온 것이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서고 사이로 사서장의 등이 보였다. 그는 오늘 치 목록을 아직 덮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