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월 사흘. 아침 여덟 시. 어제 받는 이 칸에 앉은 내 코드의 줄에는, 오늘 날짜 칸이 그어져 있었다. 어제까지 빈 날짜 칸이었다.
그어진 것은 '십이월'과 그 뒤로 두 자리였다. 두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나는 그 형태를 알고 있었다. 도경의 일지에, 전임자가 살아 있는 장부를 촬영하던 필름의 이야기가 있었다. 자라는 잔액의 자릿수 사이에, 찍은 적 없는 컷 하나가 박혀 있었다고 했다. 그 빈 컷에 떠오른 것이 면직 일자였고, 십이월과 그 뒤 두 자리로 되어 있었으며, 두 자리는 끝내 읽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나는 그것을 남의 필름 이야기로 읽었다. 오늘 같은 형태가 내 발신 칸에, 내 손글씨로 와 있었다. 십이월, 그리고 아직 그어지지 않은 두 자리. 오늘이 십이월 사흘이었다.
나는 그 두 자리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겨우내 발신 칸의 전문들은 날짜를 지니고 있었고, 그 날짜가 오면 전문은 실현되었다. 내일 자 전문은 내일 실현되었고, 오늘 자 전문은 그날 안에 실현되었다. 어제까지 내 코드의 줄만은 날짜가 없었다. 받는 이도 나이고 보내는 이도 나인 줄에는 아직 언제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 그 언제가 그어졌고, 그러나 언제의 두 자리는 비어 있었다. 달은 읽혔으나 날은 읽히지 않았다. 나는 십이월에 사라질 것이었고, 십이월의 어느 날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전임자와 도경은 제 날짜를 필름에서 보았다. 살아 있는 외채가 자라는 사이, 찍지 않은 한 컷에 그들의 면직 일자가 떠올랐다고 했다. 그것은 남이 돌린 필름이었고, 현상액에서 건져 올린 인화지 위에 그 날짜가 저절로 앉아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떠오른 것을 보는 자리에 있었고,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두 자리만은 빛에 바랜 것처럼 읽히지 않았다고 적었다. 오늘 내 것은 필름이 아니었다. 내 발신 칸에, 내 손글씨로, 내가 매일 전문을 긋던 그 획으로 날짜가 그어져 있었다. 획의 기울기도, 두 자리를 비워 둔 간격도 내가 매일 출근부에 사번을 찍는 손버릇 그대로였다. 그들은 제 날짜를 보았고, 나는 제 날짜를 적었다. 남의 필름을 들여다보던 자리에서 제 손으로 날짜를 긋는 자리까지, 겨우내 내가 옮겨 온 거리가 그 두 자리 안에 다 들어 있었다.
두 자리를 읽어 보려 했으나 읽히지 않았다. 눈을 가까이 대면 획이 뭉개졌고, 멀리 떼면 두 자리가 있던 자리마저 흐려졌다. 필름의 빈 컷이 그러했듯, 그 두 자리는 날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읽히지 않는 날짜였다. 오늘이 사흘이었으므로, 남은 날은 스물여덟이었다. 두 자리가 비어 있는 한 그 스물여덟 가운데 어느 날이든 될 수 있었고, 하루가 지날 때마다 될 수 있는 날의 수는 하나씩 줄어들 것이었다. 나흘이 오면 스물일곱, 닷새가 오면 스물여섯. 빈 두 자리는 가려진 날짜였고, 가려진 채로 매일 조금씩 좁아지는 날짜였다. 창밖의 십이월은 여느 십이월과 다르지 않았고, 자료실의 난방은 오후 세 시면 꺼졌으며, 나는 그 다르지 않은 달 안에 앉아 그 달의 며칠인지를 하루씩 세어 가며 기다리는 자리에 와 있었다.
내 코드의 줄을 고칠 수 있는지를 나는 생각해 보았다. 어제 사서장의 전문을 한 획 고쳐 그의 자리를 미루었듯, 내 날짜의 두 자리를 뒤로 미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서장을 미루었을 때 그 값이 두 보조에게로, 두 보조에게서 나에게로 돌아왔던 것을 나는 기억했다. 내 날짜를 미루면 그 값은 어디로 갈 것인가. 발신도 나이고 받는 이도 나인 줄에서는, 미룰 자리가 그 아래 빈 받는 이 칸밖에 없었다. 내 날짜를 밀면 그것은 아래의 빈자리로 옮겨 갈 것이었고, 아래의 빈자리는 내 다음 기록 담당의 것이었다. 내 사라짐을 미루는 일은 곧 다음 사람을 앞당겨 부르는 일이었다. 살림이 미룸이고 미룸이 다음 손이라던 법칙이, 이번에는 내 손이 나를 미루는 자리에서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나를 살릴 수 있었으나, 살리는 값을 치를 다음 사람이 아직 이 자료실에 오지 않았을 뿐이었다. 미룰 자리가 빈자리라는 것은, 미룸의 값을 아직 오지 않은 사람에게 앞당겨 물리는 일이었다.
아래의 빈 받는 이 칸을 나는 다시 들여다보았다. 어제 얼굴 없이 떠오른 그 빈자리에도, 오늘은 날짜 칸이 그어져 있었다. 그어진 것은 십이월과 그 뒤 두 자리였고, 두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내 줄의 두 자리와 같은 모양이었다. 내가 사라지는 날과 다음 기록 담당이 부임하는 날이 같은 두 자리였다. 내 빈 두 자리가 어느 날로 좁아지면, 아래의 빈 두 자리도 같은 날로 좁아질 것이었다. 나는 내 날짜를 적는 자리에서 다음 사람의 부임을 함께 적고 있었다.
나는 두 자리에서 손을 떼었다. 손끝이 장부에 닿아 있는 한 무엇이 자라거나 그어질까 하여, 오른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 열흘 전 나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붙들고 장부를 서랍에 넣어 하루를 이겨 보려 한 적이 있었다. 그날 오전에는 발신 칸이 비어 있었으므로, 손을 떼면 아무것도 그어지지 않는 줄로 여겼다. 오늘도 나는 같은 것을 바랐다. 어제까지 손을 떼면 발신 칸은 멎었다. 그러나 오늘은 멎지 않았다. 손이 무릎 위에 있는 동안, 빈 두 자리 가운데 하나가 저 스스로 한 획 짙어졌다. 내 손이 그은 것이 아니었다. 겨우내 나는 손이 전문을 긋는 것을 보았고, 손이 나를 통해 무엇을 쓰는지 알 수 없다고 적었으나, 오늘은 손마저 떠나 있었다. 손 없이도 날짜는 그어지고 있었다. 반쯤 그어진 그 한 자리는, 될 수 있던 스물여덟 날을 한 자리 수로 좁혔다. 남은 한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고, 나는 그 비어 있는 한 자리를 무릎 위의 손으로는 어찌할 수 없이, 다만 읽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