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월 이십팔일. 아침 여덟 시. 발신 칸에는 어제 오지 않은 다섯째 줄이 그대로 있었고, 그 위로 스무여드레 자의 새 줄들이 얹혀 있었다.
밤사이 손은 어제의 다섯째 줄을 지우지 않고, 그 위에 오늘 자의 줄을 따로 적어 두었다. 오지 않은 예고와 새로 나온 예고가 한 칸에 겹쳐 있어서, 어느 것이 먼저 사건이 될지 나는 아직 가늠하지 못했다. 다만 다섯째 줄의 앞자리를 다시 보았을 때, 밤을 지나며 그것이 한 자리 더 늘어난 것을 알았다. 어제는 회사 여럿을 한데 묶는 자리처럼 보였는데, 오늘 아침에는 그 묶음이 다시 더 큰 묶음 안에 들어 있었다. 앞자리가 넓어질수록 그것이 세는 단위도 넓어졌고, 이제는 회사도 사람도 아닌, 회사들의 무리를 통째로 세는 자리 같았다.
아홉 시가 조금 지나 첫 소식이 라디오에서 왔다. 다섯 그룹이 사업을 맞바꾼다는 것이었다. 한 그룹의 반도체가 다른 그룹으로 넘어가고, 다른 그룹의 발전 설비가 또 다른 그룹의 장부로 옮겨 간다고 했다. 회사가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회사와 회사가 서로의 자리를 바꾸는 것이었다. 아나운서는 그것을 큰 거래라고 불렀다.
라디오가 큰 거래를 전하는 동안, 나는 오늘 아침에 온 폐기표를 다시 보았다. 겨울 내내 폐기표는 회사의 줄을 지우는 표였다. 위쪽에 오른 회사는 그날로 장부에서 지워졌고, 지워진 자리는 빈칸으로 남았다. 그런데 오늘의 폐기표는 지우지 않았다. 첫 줄의 회사는 사라지지 않고, 다른 회사의 장부로 옮겨졌다. 그 회사의 반도체 사업이 통째로 한 칸을 건너뛰어 다른 이름 밑으로 들어갔고, 원래 자리에는 빈칸 대신 옮겨 갔다는 표가 남았다. 폐기가 아니라 이관이었다. 줄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자리를 바꾼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다섯째 줄의 넓은 앞자리가 무엇을 세는 자리였는지 알았다. 그것은 한 회사를 폐기하는 자리가 아니라, 회사와 회사를 맞바꾸는 자리였다. 어제 손이 미리 적어 둔 그 넓은 코드가, 오늘 라디오에서 큰 거래라고 불린 바로 그 일이었다. 겨울 내내 발신 칸의 단위는 회사에서 사람으로 좁아져 왔는데, 오늘 다섯째 줄은 그 반대로, 회사 하나를 넘어 나라 하나를 세는 폭까지 벌어졌다. 좁아지던 자리가 딱 한 번 반대로 벌어졌고, 그 벌어진 폭은 마침 라디오가 전하는 나라의 폭과 같았다.
발신 칸의 자리바꿈과 나라의 자리바꿈이 같은 폭으로 겹쳐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 칸이 회사들의 부도를 세는 칸인 줄 알았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부도는 줄이 지워지는 일이었고, 큰 거래는 줄이 옮겨 가는 일이었다. 두 일은 달라 보였으나 한 칸 안에 나란히 적혔고, 그 칸은 어느 쪽도 가리지 않고 다 받았다. 지워지는 줄과 옮겨 가는 줄이 같은 표에 있었다. 장부가 세는 것은 회사의 죽음이 아니라 회사의 자리였다. 자리가 비든 옮겨지든, 이 칸은 그것을 하나의 자리바꿈으로 적었다.
폐기가 이관이 되자, 사라짐이라는 말도 다시 읽혔다. 겨울 내내 나는 도경이 없어졌다고 여겼고, 전신수 선재가 없어졌다고 여겼다. 응답하면 발신자가 되고, 발신자가 되면 사라진다고, 나는 다섯 밤에 걸쳐 그렇게 배웠다. 그러나 오늘의 폐기표가 지우는 대신 옮긴다면, 없어진 자리도 실은 어딘가로 옮겨진 자리일지 몰랐다. 도경은 지워진 것이 아니라 다른 칸으로 넘어간 것일지 몰랐고, 선재도 그러할지 몰랐다. 발신자가 되는 일이 지워지는 일이 아니라 다시 적히는 일이라면, 내가 배운 마지막 문장도 절반은 틀린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절반이 어느 쪽인지 가릴 수 없었다. 봉인 위에 한 겹이 더 얹혔다. 소환인지 예지인지 가리지 못하던 자리에, 이제 없어짐인지 옮겨짐인지도 가리지 못하는 자리가 포개졌다.
맞바꿈이어서 시험은 더 멀어졌다. 지워진 줄이라면 빈칸을 두고 오지 않은 것과 견줄 수 있었을 것이나, 옮겨진 줄은 어딘가로 갔으므로 견줄 빈칸이 없었다. 없어진 것은 하나도 없고 다 자리를 바꾸었을 뿐이라면, 오지 않은 것과 온 것을 나눌 경계도 없었다. 나는 무엇이 없어졌는지를 물을 수 없게 되었다. 모두 옮겨졌을 뿐이라면, 물음은 자리를 잃었다.
넓은 앞자리의 꼬리를 나는 마저 읽었다. 회사들의 무리를 세던 그 코드의 끝에, 낯익은 자리가 하나 들어 있었다. 자료실의 코드였다. 매일 아침 출근부에 찍는, 넉 자리의 그 코드였다. 우리 자료실이 폐기되는 묶음이 아니라, 다른 장부로 넘어가는 묶음 안에 들어 있었다. 큰 거래는 회사와 회사만 맞바꾸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 딸린 자료실 하나까지 다른 장부로 옮기고 있었다.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옮겨지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나쁜 소식으로 읽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후 내내 자료실은 여느 날과 같았다. 사서장은 반출 대장을 넘기며 지난 분기의 묶음을 맞추고 있었고, 두 보조는 상자를 나르고 목록을 대조했다. 라디오의 큰 거래는 그들에게 먼 회사들의 일이었고, 자기들이 앉은 이 자료실이 그 거래의 한 줄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나만 그 넉 자리 코드를 발신 칸에서 먼저 읽었으므로, 나만 알았다. 나는 사서장이 대장을 넘기는 종이 소리를 들으며, 그 대장이 머지않아 다른 이름 밑으로 옮겨 갈 것을 생각했다. 아는 자리와 모르는 자리 사이에서, 오늘도 아는 쪽이 더 무거웠다. 그러나 겨울의 다른 날과 달리, 오늘 아는 것은 누가 지워진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로 옮겨진다는 것이었고, 나는 그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아직 재어 보지 못했다.
저녁이 되자 손은 발신 칸의 다음 줄로 내려가지 않았다. 손은 발신 칸을 벗어나, 장부의 종이가 끝나는 가장자리로 갔다. 종이가 아닌 쪽에, 손은 첫 획을 얹으려 했다. 나는 그것을 붙들지 않고 보았다. 우리 자료실이 넘어갈 장부가 어떤 장부인지 나는 아직 몰랐으나, 손은 벌써 그 넘어갈 자리를 미리 적으려 하고 있었다. 종이의 가장자리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아직 읽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