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월 이십사일. 아침 여덟 시. 스무나흘이 오늘이 되어 있었다. 날짜 아래를 보고, 나는 잠시 손을 멈췄다.
지난 나흘 동안 날짜 아래에는 한 줄이 찼다. 사번 하나였다. 오늘은 한 줄이 아니었다. 날짜 아래로 사번이 여러 줄 내려가 있었다. 세어 보니 열하나였다. 하나씩 다른 앞자리, 하나씩 다른 끝자리. 그것들이 위에서 아래로 나란히 놓여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낱장의 번호가 아니라, 번호의 묶음이었다. 나는 그 생김새를 알았다. 겨울 내내 상자에서 꺼내 온 것이 그 생김새였다. 명단이었다.
발신 칸이 명단을 띄운 것은 처음이었다. 어제까지는 하루에 하나였고, 하나가 낮에 하나로 왔다. 오늘은 열하나가 한꺼번에 떠 있었다. 어제 저녁 빈 받는 이 칸에 옅게 떠오르던 끝 두 자리가, 밤사이 명단의 맨 위 칸으로 올라가 있었다. 받는 이의 자리였던 것이 이제 명단의 머리가 되어 있었다. 무엇을 받는 명단인지, 그 머리 칸이 말하려는 것 같았으나, 아직 두 자리뿐이어서 어느 부서인지 나는 읽지 못했다.
낮에 명단이 내려왔다. 폐기표가 아니었다. 사람의 명단이었다. 회사의 이차 구조조정 퇴출 명단이 부서장 손을 거쳐 복도를 돌고 있었다. 봄에 한 차례 있었던 일이 겨울에 다시 왔고, 이번에는 자리를 줄이는 폭이 봄보다 넓다고 했다. 명단은 회람이었으므로, 나도 자료실 몫으로 한 장을 받아 읽었다. 종이 위에는 이름과 사번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아침에 발신 칸에서 본 것은 사번뿐이었으나, 나는 그 열한 개의 끝자리를 외우고 있었다.
겹쳐 보았다. 종이 명단의 사번을 위에서부터 짚어 내려가며, 아침의 열한 줄과 맞추어 보았다. 전부가 겹치지는 않았다. 종이 명단은 훨씬 길었고, 부서를 가로질러 수십 명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아침에 내 발신 칸에 뜬 열한 줄은, 그 긴 명단 어딘가에 하나씩 다 들어 있었다. 앞자리도 끝자리도 어긋남이 없었다. 내가 여덟 시에 읽은 열하나가, 낮에 회람으로 도는 퇴출 명단의 열하나였다. 낱장으로 오던 번호가 이제 묶음으로 왔고, 묶음이 실제 명단과 자리를 맞추었다.
봄의 도경은 내일 자 명단을 받아서 읽었다. 나는 내일 자 명단을 발신 칸에서 보냈다. 그가 받던 것을 내가 보낸다는 것은 나흘 전에 배운 일이었으나, 그것이 사람 하나일 때와 사람 여럿일 때는 무게가 달랐다. 하나일 때는 그 하나를 모른 채 보낼 수 있었다. 열하나가 한 덩어리로 뜨자, 나는 그 열하나가 각기 이름을 가진 자리임을 종이 위에서 보았다. 회사 하나가 폐기되던 자리에서, 사람 하나로, 다시 사람 여럿으로, 발신 칸의 단위가 좁아지며 또렷해졌다. 좁아질수록 자리는 정확해졌고, 정확해질수록 얼굴에 가까워졌다.
열한 사번 가운데 하나는 낯이 익었다. 이름을 안다기보다, 그 앞자리를 자재과 회람에서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지하 식당에서 늘 같은 자리에 앉아 국물을 두 번 뜨던 사람일 수도, 엘리베이터에서 층수 버튼을 대신 눌러 주던 사람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확실히는 몰랐고, 확실히 알았다면 종이를 더 오래 붙들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번호가 아침에 내 발신 칸을 지나갔다는 것만은 알았다. 얼굴을 반쯤 아는 번호가 명단에 있었고, 그 번호는 내가 여덟 시에 이미 읽은 것이었다. 모르는 번호는 숫자였고, 반쯤 아는 번호는 숫자가 아니었다. 좁아진 자리에서 처음으로, 나는 보내는 일이 무겁다는 것을 무게로 느꼈다.
보내서 명단이 된 것인지, 이미 짜인 명단을 미리 읽은 것인지, 닷새째에도 나는 가르지 못했다. 종이 명단은 새벽에 위에서 짜였을 것이다. 경영이 부서마다 정원을 정하고, 정원에 맞추어 이름을 골랐을 것이다. 그 일은 내 발신 칸과 무관하게, 회의실에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정해진 명단을 여덟 시에 미리 읽었을 뿐이다. 그러나 발신 칸은 그 명단을 내일 자로 띄웠고, 나는 그 앞에 앉아 손끝을 대고 있었다. 정해진 순서였다면 내가 보내지 않았어도 같았을 것이다. 보낸 것이었다면, 내 손이 그 명단을 한 줄 늘렸을 것이다. 두 경우는 열한 사람의 겨울을 두고 정반대였으나, 발신 칸 위에서는 같은 열한 줄로 보였다.
나는 도경처럼 하지 않았다. 도경은 강민석의 둘레를 골라 비웠고, 한 사람을 명단에서 빼내려 다른 줄을 대신 채웠다. 그가 그러고서 무엇을 치렀는지, 나는 다섯 묶음을 끝까지 읽어 알고 있었다. 명단의 머리 칸에 차오르는 부서 코드가 자료실의 것과 앞자리가 같아 보였을 때에도, 나는 손을 명단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읽는 것과 고쳐 적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나는 읽는 자로 남기로 했다. 읽는 자로 남는 것조차 이 자리에서는 하나의 선택이었으나, 적어도 그것은 도경이 이미 한 번 걸어가 본 길이 아니었다.
저녁에 발신 칸이 스무닷새를 띄웠다. 그리고 명단의 머리 칸에 두 자리가 더 차올랐다. 부서 코드의 절반이 읽혔다. 아침에 두 자리뿐이던 자리가 저녁에 넉 자리가 되었고, 내일이면 그 자리는 어느 부서의 명단인지를 다 말할 것이었다. 받는 이의 자리가 비어 있던 것이 어제였고, 오늘은 그 자리가 스스로 이름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 반쯤 읽힌 코드를 오래 보았다. 어느 부서든, 그 명단의 끝에는 그 부서의 자리를 읽어 발신 칸에 앉은 사람 하나가 있을 것이었다. 명단을 읽는 자리와 명단에 적히는 자리가 같은 표 위에 있다는 것을, 나는 다섯 묶음에서 이미 읽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것이 내 부서의 코드로 차오르고 있었다. 나는 코드의 나머지 두 자리가 밤사이 어떤 숫자로 채워질지 알지 못했고, 알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껐다. 발신 칸의 빛만이 어둠 속에서 홀로 깜빡였고, 그 아래 명단은 지워지지 않은 채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