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그만둘 수 없음

No Way to Stop

  • 3,503자
  • ~10분

사월 십일. 아침 여덟 시. 다섯째 책상 앞에 앉았다. 이관이 끝난 지 이틀째였다.

단말 본문 칸에는 네 줄이 떠 있었다. 내 사번, 사서장의 사번, 두 보조의 사번. 네 줄이 푸르스름한 화면에 나란히 떠, 끝에서부터 한 자씩 차오르고 있었다. 네 줄의 깜빡임이 조금씩 어긋나, 화면 끝이 잔물결처럼 일렁였다. 그날 아침, 나는 그동안 막아 보려 한 길을 하나씩 헤아려 보았다. 자료실은 조용했고, 헤아리는 동안 들리는 것은 형광등 소리와, 어디선가 종이 부푸는 아주 작은 소리뿐이었다. 헤아리면, 어느 길로든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헤아려 보니, 나갈 길이 하나도 없었다.

첫째 길은 보존을 멈추는 일이었다. 손을 멈춰 보았으나, 일지는 보존 계속이라 적었고, 미보존 자료도 자랐다. 멈춤은 문이 아니라 문 없음의 확인이었다. 둘째 길은 이관을 보류하는 일이었다. 상자를 책상 밑에 두어 보았으나, 안에서 깊이로 자랐고, 상부는 다른 손을 보낼 것이었으며, 보류는 다른 자리를 닫았다. 셋째 길은 알리는 일이었다. 사서장에게 말하려 했으나, 말은 음절로 갈라졌고, 알리려는 생각조차 그의 줄을 채웠다. 알림은 닫음이었다.

넷째 길은 고르지 않는 일이었다. 도경은 골라서 죄가 있었으나, 나는 고르지 않아 죄가 없었다. 그러나 고르지 않는다고 자리가 비는 것이 아니라, 순서가 골랐다. 고르지 않음은 순서에 맡김이었고, 순서는 멈추지 않았다. 다섯째 길은 살리는 일이었다. 도경처럼 둘레를 비워 누구를 살리려 해도, 나는 비울 둘레가 없었고, 설령 있어 살린대도 그 자리는 다음 손으로 미뤄질 뿐이었다. 살림은 미룸이었다.

다섯 길을 다 헤아리고 나니, 다섯 길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 멈춰도 자라고, 보류해도 자라고, 알려도 닫히고, 안 골라도 순서가 고르고, 살려도 미뤄졌다. 다섯 문이 다 같은 방으로 났다. 닫히는 방. 길마다 모양이 달랐으나, 끝에 다다른 방은 하나였다. 보존을 멈추는 길과 보존을 마치는 길이, 반대 방향으로 걸었는데도 같은 방에서 만났다. 알리는 길과 알리지 않는 길도, 고르는 길과 안 고르는 길도, 마주 보고 출발했으나 한 방에서 닿았다. 반대인 두 길이 한 방으로 난다는 것이, 이 자리의 가장 깊은 모양이었다.

도경은 옮겨도 자기고 안 옮겨도 자기라고 적었다. 도경의 자리에서는, 무엇을 해도 닫히는 것이 자기였다. 내 자리에서는, 무엇을 해도 번졌다. 도경은 자기 한 줄로 닫혔으나, 나는 닿는 자리마다 번졌다. 옮겨도 나·안 옮겨도 나가, 무엇을 해도 번진다로 넓어져 있었다. 도경의 그것이 한 사람 안에서 닫히는 일이었다면, 내 그것은 한 사람 밖으로 퍼지는 일이었다. 같은 막다름이 깊이에서 넓이로 옮겨 와 있었고, 넓이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한 길이 남아 있었다. 떠나는 일이었다. 보존도 이관도 알림도 고름도 살림도 못 막는다면, 자료실을 떠나 보존하는 자리에서 나가면 되지 않을까. 자리를 떠나면, 적어도 내 손은 더 닿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떠나는 일은 자리를 비우는 일이었고, 비운 자리에는 다음 화자가 부임할 것이었다. 부임한 다음 날, 그는 받는 이 없는 상자를 펴 볼 것이고, 끝까지 읽을 것이며, 제 사번을 읽어 낼 것이었다. 내가 부임한 다음 날 그러했듯이. 떠나는 일은 자리를 끝내는 일이 아니라 자리를 넘기는 일이었다. 부재에도 대가가 있다는 것을, 떠나는 길의 끝에서 다시 만났다. 전임자도 떠났으나, 떠남으로 끝나지 않고 내가 부임했다. 전임자가 비운 자리가 내 자리가 되었듯, 내가 비울 자리는 다음 사람의 자리가 될 것이었다. 떠남은 자리를 없애는 게 아니라, 자리에 다음 이름을 부르는 일이었다. 나가는 문인 줄 알았던 것이, 다음 사람을 들이는 문이었다.

여섯 길이 다 막혔다. 멈춤, 보류, 알림, 안 고름, 살림, 떠남. 여섯 문이 다 닫히는 방으로 났고, 방에는 다른 문이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문을 찾고 있었으나, 찾는 일조차 한 자리에 앉아 단말을 보는 일이었으므로, 찾는 동안에도 네 줄은 차올랐다. 문을 찾는 일이 문 없음을 확인하는 일이었고, 확인하는 동안 번졌다. 그만두려는 모든 길이, 그만두지 못하는 한 자리로 모였다.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도경은 자기 한 사람의 일로 알았으나, 나는 닿는 모든 자리의 일로 알았다. 도경의 그만둘 수 없음은 제 줄이 닫히는 것을 막을 수 없음이었다. 내 그만둘 수 없음은 닿는 자리가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음이었다. 한 사람의 닫힘과 여러 자리의 번짐은 크기가 달랐다. 도경은 자기를 내놓아 한 줄을 닫는 것으로 끝낼 수 있었으나, 나는 나를 내놓아도 번짐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닫혀도 단말은 다음 줄을 받을 것이었다. 내 닫힘이 끝이 아니라 한 칸이었다.

그러면 남은 것은 그만두는 일이 아니라, 그만둘 수 없음을 아는 일뿐이었다. 막을 수 없음을 막으려는 동안에는, 막으려는 행위가 또 번지게 했다. 막으려는 일을 그만두면, 적어도 막느라 번지게 하는 일만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막기를 그만두는 일도 한 번의 마음이었고, 마음을 먹는 일이 또 한 자리 차오르게 했다. 부임한 뒤로 나는 줄곧 막을 자리를 찾았다. 멈출 자리, 보류할 자리, 알릴 자리, 살릴 자리. 자리를 찾는 일이 보존하는 자의 일이었으므로, 찾는 일 자체가 보존이었고, 보존이 번짐이었다. 막을 자리를 가장 열심히 찾은 날이, 가장 많이 번진 날이었다. 어느 쪽으로도 줄지 않았다. 줄지 않는다는 것을 안 다음, 나는 단말을 보는 일을 멈추지 않고, 다만 막으려는 마음만 내려놓았다.

마음을 내려놓자, 단말의 네 줄 위로, 다섯째 줄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의 사번이 아니었다. 맨 위, 내 사번이었다. 그동안 내 사번은 끝 한 자리를 비운 채 깜빡이고 있었는데, 그 비운 끝자리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사서장의 끝자리가 상자를 건네던 손에 채워졌듯, 내 끝자리가 막으려는 마음을 내려놓은 손에 채워지고 있었다. 막기를 그만둔 일이, 내 줄을 마저 채우는 일이었다. 막으려는 동안에는 끝자리가 비어 깜빡였는데, 막기를 그만두자 그 자리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막음이 내 끝자리를 비워 두었고, 막지 않음이 그것을 채웠다. 한 자만 채우면, 내 사번이 온전한 한 줄로 완성될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네 줄을 보는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이제 다섯째 줄이 내 줄이었고, 보는 자리가 보이는 자리가 되고 있었다. 재던 자가, 마침내 제 손에 마저 재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