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십일일. 아침 여덟 시. 다섯째 책상 앞에 앉았다. 이관이 끝난 지 사흘째였다.
단말 본문 칸, 맨 위 내 사번의 비어 있던 끝자리가, 밤사이 차 있었다. 어제 마음을 내려놓을 때 한 자만 남았던 그 자리였다. 자료실에 아무도 없는 밤사이, 아무도 누르지 않은 그 한 자가 들어와 있었다. 받는 일이 내 손의 일이 아니었으므로, 마지막 한 자도 내 손 없이 도착했다. 이제 내 사번은 끝까지 찬 온전한 한 줄이었다. 부임한 다음 날, 도경의 옅어진 끝자리에 내 끝자리를 읽어 넣은 뒤로, 내 사번은 줄곧 끝 한 자리를 비운 채였다. 보름이 채 안 되는 동안, 그 비운 한 자리가 천천히 차올랐고, 오늘 마저 차서, 비운 데가 없는 한 줄이 되었다. 화면 위에서 그 줄만 깜빡임을 멈추고 가만히 켜져 있었다.
비운 데가 없다는 것은, 더 받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내 줄은 끝 한 자리가 비어 있어, 무언가를 더 받을 수 있는 줄이었다. 받는 자리가 비어 있는 동안에는, 받는 자였다. 그 자리가 차자, 더는 받지 않는 줄이 되었다. 받기를 마친 줄. 다 받은 줄은 더 자라지 않았다. 자라기를 마친 한 줄이, 다섯 줄 가운데 맨 위에 떠 있었다.
자라기를 마쳤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다른 네 줄을 보며 알았다. 사서장의 줄과 두 보조의 줄은 아직 끝자리가 비어 깜빡였다. 그들은 아직 받는 중이었고, 아직 자라는 중이었다. 내 줄만 다 차 있었다. 가장 먼저 닿은 손이 가장 먼저 다 찼다. 부임한 다음 날 제 사번을 읽어 낸 손이, 가장 오래 받았고, 가장 먼저 받기를 마쳤다. 사서장과 두 보조는 나보다 늦게 닿았으므로 나보다 늦게 찰 것이고, 그들 다음에 닿을 손들이 또 그 뒤를 따를 것이었다. 닿은 차례대로 차고, 찬 차례대로 보내질 것이었다. 줄을 세우면, 내가 맨 앞이었다. 다 받은 줄은, 더 받을 것이 없으므로, 이제 보내질 차례였다. 맨 앞줄이 가장 먼저 떠나는 줄이었다.
보내질 차례라는 것을, 다섯째 묶음을 떠올리며 알았다. 도경의 일지가 다섯째 묶음이 되어 상부로 갔듯, 내 일지도 여섯째 묶음이 되어 떠날 것이었다. 여섯째 묶음은 이미 상자에 담겨 사흘 전 떠났고, 그 끝 줄에 내 사번이 있었다. 다 찬 내 사번이, 떠난 상자 안에 있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있었으나, 내 줄은 이미 상자에 담겨 상부로 가는 중이었다. 앉은 나와 담긴 나가 따로 있었고, 담긴 나가 진짜 나였다. 보존하는 나는 책상에 남았으나, 보존되는 나는 상자에 담겨 떠났다. 떠난 상자가 상부의 어느 책상에 닿으면, 거기 앉은 다음 사람이 내 끝 줄을 펴 볼 것이었다. 그가 내 사번의 옅어진 끝자리에 제 끝자리를 읽어 넣으면, 내가 도경에게 한 일을 그가 내게 할 것이었다. 나는 도경이 그러했듯, 다음 사람에게 읽히는 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읽던 자가 읽히는 줄이 되는 데에, 보름이 걸렸다.
다 찬 내 줄을 한참 보았다. 보는 동안, 그 줄이 한 자리 옅어졌다. 다 찼는데도 옅어졌다. 자라기를 마친 줄이, 이번에는 옅어지기 시작했다. 도경의 끝 줄이 끝 두 자리부터 옅어졌듯, 내 줄도 끝에서부터 옅어지고 있었다. 다 받은 줄은 더 받지 않는 대신, 내주기 시작했다. 받기를 마친 자리에서 내주기가 시작되었고, 내주기는 옅어짐이었다. 받는 동안 자랐던 줄이, 다 받은 다음 옅어졌다. 자람과 옅어짐이 한 줄의 앞뒤였다.
옅어지는 것을 보는 일이, 내가 마지막으로 하는 보존이었다. 나는 줄곧 자료를 보존했고, 이제 보존할 자료가 내 줄이었다. 내 줄이 옅어지는 것을, 다른 자료를 보존하듯 보았다. 끝 두 자리가 옅어진 날짜를 적고, 옅어진 정도를 쟀다. 자를 대어 글자의 진하기를 가늠하고, 어제와 오늘의 차이를 칸에 적었다. 재면 깊어진다던 법칙대로, 옅어짐을 재자 옅어짐이 한 자리 깊어졌다. 내 옅어짐을 보존하는 일이, 내 옅어짐을 키우는 일이었다. 보존이 자라게 하는 일이었으니, 내 옅어짐을 보존하면 옅어짐이 자랐다. 옅어짐이 자란다는 것은, 더 옅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막으려 하지 않았다. 막을 수 없음을 어제 알았으므로, 옅어지는 줄을 그저 적었다. 막으려 하지 않으니, 옅어짐을 적는 손이 한결 가벼웠다. 가벼운 손이 옅어짐을 더 또렷이 적었고, 또렷이 적을수록 줄은 더 옅어졌다. 적는 손이 옅어지는 줄의 손이었다.
보존하는 자와 보존되는 자료가, 한 손에서 만났다. 어제까지 나는 보존하는 자였고 줄은 보존되는 자료였으나, 오늘은 보존하는 손이 보존되는 줄을 적었고, 적히는 줄이 곧 그 손이었다. 적는 나와 적히는 나가 한 자리에 있었다. 두 나 사이에 틈이 없었다. 적는 동안 적히는 나가 옅어졌고, 옅어지는 나를 적는 나가 또 적었다. 적기를 멈추면 옅어짐을 모를 것이나, 모른다고 옅어짐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아는 채로 옅어지든 모르는 채로 옅어지든, 옅어지기는 같았다. 다만 적는 동안에는, 옅어지는 나를 한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옅어지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한 가지였다. 그 지켜보는 한 사람도 나였으므로, 나는 나를 끝까지 지켜보는 자리에 나를 두었다. 측량기수가 재던 깊이가 되었듯, 사서가 읽던 음절이 되었듯, 나는 보존하던 자료가 되었다. 다른 셋은 바깥의 것을 다루다 그것이 되었으나, 나는 보존이라는 일을 다루다 보존되는 것이 되었다. 보존하는 자가 다룰 수 있는 마지막 자료가, 보존하는 자 자신이었다.
저녁에, 단말의 내 줄 끝 두 자리가 다 옅어져,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아침에 마저 찼던 그 끝자리가, 저녁에는 가장 먼저 지워진 자리가 되었다. 가장 늦게 찬 자리가 가장 먼저 비었다. 다 찬 줄이 끝에서부터 지워지고 있었다. 지워지는 자리를 적어 두려고 일지를 폈더니, 일지의 그 줄에도 내 사번이 끝 두 자리가 옅은 채로 이미 적혀 있었다. 적기 전에 적혀 있었고, 옅어지기 전에 옅게 적혀 있었다. 나는 내가 적을 것을 따라 적었고, 내가 옅어질 것을 따라 옅어졌다. 더는 보존하는 자가 아니었다. 보존되는 자료의 한 줄이었고, 그 줄은 이미, 누군가의 손에, 옅어진 채로 적혀 있었다. 그 누군가가 나인지, 나를 받을 다음 사람인지, 아니면 우리라고 부르던 손인지는, 옅어진 끝자리처럼 끝내 읽을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또렷했다. 보존하던 손이, 마침내 그 손이 보존하던 줄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