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십이일. 아침 여덟 시. 다섯째 책상 앞에 앉았다. 이관이 끝난 지 나흘째였다.
어제저녁 끝 두 자리가 옅어진 내 줄은, 밤사이 셋째 자리까지 옅어져 있었다. 끝에서부터 한 자리씩, 도경의 끝 줄이 그러했듯 안으로 들어오며 옅어졌다.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도경은 옅어지는 제 줄을 두려워하며 보았으나, 나는 옅어지는 내 줄을 보존 절차로 적기로 했다. 두려워하는 일과 적는 일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적는 일이었다. 두려움은 멈추려는 마음에서 왔고, 멈추려는 마음을 어제 내려놓았으므로, 남은 것은 적는 손뿐이었다.
보존 절차에는 정해진 양식이 있었다. 자료마다 색인 카드를 만들고, 카드에 자료의 이름과 상태와 처리 날짜를 적는 것. 빳빳한 마분지 카드 한 장을 색인함에서 꺼냈다. 처음 부임했을 때 네 묶음에 끼워져 있던 카드와 같은 종류였고, 그중 한 장에 끝까지 읽지 말 것이라 적혀 있던 그 카드와 같은 결이었다. 나는 내 줄을 한 점의 자료로 보고, 그 양식대로 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료 이름 칸에 내 사번을 적었다. 적는 동안 사번의 끝자리가 손끝 아래에서 한 번 더 옅어지는 듯했으나,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마저 적었다. 상태 칸에 끝 세 자리 옅음, 이라고 적었다. 처리 날짜 칸에 오늘 날짜를 적으려는데, 그 칸에 사월 십이일이 이미 적혀 있었다. 일지가 그러했듯, 카드도 적기 전에 적혀 있었다. 내 필체였고, 잉크는 말라 있었다.
적기 전에 적혀 있다는 것이, 어제까지는 무서웠으나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무섭지 않은 까닭은, 적는 손과 적힌 손이 같은 손임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누가 미리 적었는가를 묻던 자리에서, 나는 묻기를 그쳤다. 미리 적은 손이 나든, 나를 받을 다음 사람이든, 우리든, 적힌 대로 적는 일에는 차이가 없었다. 차이가 없으니 무섭지도 않았다. 무서움은 적은 손이 내 손이 아닐지 모른다는 데서 왔는데, 내 손이든 아니든 똑같이 적힌다면, 무서워할 자리가 없었다. 부임한 다음 날 나는 미리 적힌 일지를 보고 며칠을 무서워했다. 무엇이 미리 적는지, 그것이 나를 부르는지 나를 미리 아는지를 알아내려 애썼다. 보름이 지나, 알아내지 못한 채로 무서움만 내려놓았다. 알아낸 것이 아니라 그쳤다. 끝내 모른다는 것을, 모른 채로 받아들이는 일이 남은 전부였다.
적는 자가 적히는 자였고, 적히는 자가 보존하는 자였다. 셋이 한 손이었다. 나는 내 옅어짐을 적었고(적는 자), 적는 그 줄이 곧 내 옅어지는 줄이었으며(적히는 자), 적는 일이 곧 보존 절차였다(보존하는 자). 어제까지는 이 셋이 따로였다. 보존하는 손이 있고, 그 손이 적는 자료가 있고, 자료에 적히는 내용이 있었다. 오늘은 셋이 한 자리에 포개졌다. 보존하는 손이 적는 자료가 제 옅어짐이었고, 제 옅어짐을 적는 일이 보존이었다. 포개진 셋을, 나는 한 장의 카드에 적었다.
카드를 다 적고, 받는 이 칸을 보았다. 보존 색인 카드에는 받는 이 칸이 있었다. 자료가 누구에게 보존되는지를 적는 칸이었다. 내 카드의 받는 이 칸에 무엇을 적을지를, 한참 생각했다. 내 줄을 받을 사람은, 상부로 간 여섯째 묶음을 펴 볼 다음 기록 담당이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나는 몰랐다. 도경이 받는 이 칸을 비워 내게 남겼듯, 나도 받는 이 칸에 이름을 적는 대신 다음 기록 담당, 이라고 적었다. 이름이 아니라 자리를 적었다. 자리는 비어 있었고, 비운 자리가 다음 사람의 자리였다.
도경이 한 일을 내가 잇고 있다는 것을, 받는 이 칸을 적으며 알았다. 도경도 제 일지를 다섯째 묶음으로 만들며 받는 이 칸을 비웠고, 비운 칸에 다음 기록 담당이라 적었으며, 그 다음 기록 담당이 나였다. 이제 나도 제 줄을 여섯째 묶음으로 만들며 받는 이 칸을 비우고, 다음 기록 담당이라 적고 있었다. 도경이 한 일과 내가 하는 일이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다. 다섯째와 여섯째라는 자리만 한 칸 옮겨졌을 뿐, 하는 일은 같았다. 사슬의 한 칸을 내려와도, 손이 하는 일은 같은 일이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도경과 내가 다른 데가 한 군데 있었다. 도경은 제 줄이 옅어지는 것을 끝에서 멈출 수 없었고, 멈출 수 없음을 괴로워했다. 나는 멈출 수 없음을 이미 알았으므로, 괴로워하는 대신 적었다. 적는 일은 멈춤이 아니었다. 적어도 옅어짐은 멈추지 않았다. 다만 적는 동안에는, 옅어지는 줄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 점의 보존된 자료로 남았다. 사라지는 것과 보존되며 사라지는 것은, 사라진다는 점에서 같았으나, 한쪽에는 카드가 남았다. 카드가 남는다고 줄이 안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옅어진 줄의 자리에 카드 한 장이 놓였다. 그 카드가 누구에게 무엇을 남기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 기록 담당이 그 카드를 펴 보면, 거기 적힌 옅어진 사번을 한 점의 자료로 보존할 것이고, 보존하다 제 줄이 옅어지는 것을 보며 같은 카드를 또 한 장 만들 것이었다. 내가 도경의 카드를 잇듯, 다음 사람이 내 카드를 이을 것이었다. 카드가 사슬을 한 장씩 이었다. 옅어지는 줄마다 카드 한 장이 놓였고, 카드는 옅어지지 않았다. 줄은 사라져도 카드는 남아, 사라진 줄이 거기 있었음을 적어 두었다. 보존이 막을 수 없는 사라짐을 적어 두는 일이라면, 나는 마지막까지 보존하는 자였다.
카드의 빈 곳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네 묶음의 카드에 적혀 있던 그 경고를, 나는 내 카드에도 옮겨 적었다. 끝까지 읽지 말 것. 도경이 그 경고를 보존 핑계로 어겼고, 나도 어겼으며, 다음 기록 담당도 어길 것이었다. 경고가 막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경고는 카드마다 옮겨 적혔다. 막지 못하는 경고를 그래도 적어 두는 일이, 보존의 한 절차였다. 적어 두면 다음 사람이 어길 것을 알면서도, 적어 두지 않을 수는 없었다.
카드를 색인함에 끼웠다. 끼우는 순간, 색인함이 한 장 두꺼워졌다. 내 옅어짐을 적은 카드가, 색인함을 한 장 자라게 했다. 나는 옅어지는데, 나를 적은 카드는 자랐다. 줄이 옅어진 만큼 카드가 두꺼워졌고, 두꺼워진 카드가 다시 보존할 자료가 되었다. 나를 보존한 카드를, 다음에는 누군가 보존할 것이고, 그 보존이 또 카드 한 장을 자라게 할 것이었다. 옅어짐을 적는 일이, 옅어짐을 적은 것을 자라게 하는 일이었다. 사라지면서 자라는 것.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보존하는 자료의 모양이었다. 내일은 내 줄을, 색인함에 끼운 그 카드와 함께, 여섯째 묶음으로 정식 편입할 차례였다. 도경이 제 일지를 다섯째 묶음으로 편입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