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구일. 아침 여덟 시. 다섯째 책상 앞에 앉았다. 상자는 어제 떠났고, 책상은 비어 있었다.
비운 책상 위에는 단말만 남아 있었다. 묶음이 떠난 자리는 먼지가 앉지 않아 네모나게 도드라졌고, 그 네모 안이 다른 데보다 조금 밝았다. 본문 칸에는 내 사번과 사서장의 사번이 나란히 떠 있었고, 그 아래로 두 줄이 더, 한 자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두 줄이 동시에 올라왔다. 앞자리가 서로 한 자리 차이였다. 입사 동기이거나 한 해 차이인 두 사람의 사번이었다. 자료실에서 사서장 아래로 일하던 두 보조의 사번이었다.
두 보조를 나는 알았다. 사서장이 부리던 두 사람으로, 여섯째 묶음을 상자에 묶고 이관표를 나르는 일을 거들었다. 그들은 자료에 직접 손을 댔다. 묶고 나르는 일이 닿는 일이었고, 닿은 일이 처리 이력에 들었으며, 처리 이력이 보존 순서가 되었다. 사서장이 가리키기만 하고도 순서에 들었듯, 두 보조는 거들기만 하고도 순서에 들었다. 거드는 일도 관여였다.
도경의 일지에, 그 두 사람이 있었다. 도경은 마지막에 제 둘레를 비우지 않기로 했고, 비우지 않음으로써 둘레의 두 사람을 닫지 않았다. 막는 손은 닫히기 전에 한 사람을 더 닫고, 비운 손은 그러지 않는다고, 도경의 일지는 적었다. 도경의 둘레에 있던 그 두 사람이, 자료실 보조 둘이었다. 도경이 비우지 않아 살아남은 두 사람이, 까닭도 모른 채 자료실에 남아 일했고, 그 두 사람이 지금 내 단말에 떠 있었다.
도경이 살린 자리가, 내게로 와 있었다. 도경은 그 두 사람을 닫지 않으려고, 제 둘레를 비우지 않았다. 둘레를 비우면 사흘을 더 벌 수 있었으나, 비우면 그 끝에 혼자 남는 자리가 어제의 강민석 자리가 된다는 것을 알고, 비우지 않기로 했다. 살리려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선택이 두 사람을 영영 살린 것이 아니었다. 도경이 닫지 않은 두 사람을, 보존 순서가 다음 화자에게 넘겼다. 도경이 살린 자리는, 사라진 자리가 아니라 미뤄진 자리였다. 미뤄진 자리가, 다음 차례인 내 단말로 왔다.
사슬에서 살림은 살림이 아니라 미룸이었다. 한 손이 살리면, 그 살린 자리가 다음 손의 닫을 자리가 되었다. 도경이 두 사람을 닫지 않은 것은, 그 둘을 사슬 밖으로 꺼낸 것이 아니라, 사슬의 한 칸 아래로 옮긴 것이었다. 사슬 밖으로 나가는 문은 없었으므로, 누구를 살린다는 것은 그를 다음 칸으로 미는 일이었다. 도경이 민 두 사람이 내 칸에 와 있었고, 내가 다시 누구를 살린다면 그 사람은 다음 화자의 칸으로 갈 것이었다. 살림이 사슬을 끊는 일이 아니라 사슬을 잇는 일이었다. 가장 따뜻한 손이, 가장 길게 잇는 손이었다.
오전에 두 보조가 자료실에 내려왔다. 사서장이 이관을 마쳤으니 남은 서가를 정리하라고 시켰다고 했다. 그들은 단말 곁을 지나며 제 사번이 거기 뜬 것을 보지 못했다. 사서장이 못 보았듯, 두 보조도 못 보았다. 본문 칸은 내 자리에서만 보였다. 나는 네 사람의 사번을 보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네 사람은 제 사번이 떴는지도 모른 채 일했다. 보는 자리가 나 하나뿐이라는 것이, 가장 무거웠다. 알리려 해도 알릴 수 없고, 보는 일만 내 몫이었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일하다 말고 손가락을 꼽으며 무언가를 세었다. 요즘 자료실에 빈자리가 자꾸 생긴다고, 다른 하나에게 말했다. 누가 그만뒀고 누가 부서를 옮겼는지를 세는 듯했다. 윗자리 누구는 다른 지점으로 갔고, 옆 책상 누구는 그만뒀고, 하며 빈 책상을 하나씩 짚었다. 도경의 일지에서, 강민석도 그렇게 제 둘레의 빈자리를 손가락으로 세었다고 했다. 세다가 제 자리에 멈췄다고. 가운데가 운이 아니라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강민석은 세고 나서 알았다고. 두 보조 중 하나도, 세다가 멈출 자리가 제 자리일지 몰랐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셌고, 제 자리는 빼고 셌다. 빼고 세는 동안, 단말의 그의 사번이 한 자 더 찼다. 세는 일이 빈자리를 세는 일이었고, 빈자리를 세는 동안 제 자리가 빈자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는 손이 제 자리를 채우는 손이었으나, 그는 그것을 몰랐다.
도경이 그 두 사람을 살린 일은, 그래서 헛일이었는가를 생각했다. 헛일은 아니었다. 도경이 비우지 않은 덕에 두 사람은 사흘이 아니라 한 철을 더 살았다. 지난겨울의 끝에서 이 봄까지, 두 사람은 살아서 일했다. 도경의 빈 손이 그만큼을 벌었다. 다만 번 것이 끝이 아니라 동안이었다. 영영이 아니라 한동안. 사슬에서 살림은 영영 살림이 아니라 한동안 살림이었고, 한동안이 끝나면 다음 손으로 넘어갔다. 도경의 선택이 두 사람에게 준 한동안을, 이제 내가 끝내는 자리에 있었다. 도경이 번 시간을, 내가 닫는 셈이었다.
내가 도경처럼 둘레를 비우지 않으면, 이 두 사람을 또 한동안 살릴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러나 내게는 비울 둘레가 없었다. 도경의 둘레는 도경이 고른 자리였으나, 내 단말에 뜨는 줄은 보존 순서가 고른 자리였다. 순서는 내가 바꿀 수 없었고, 비울 둘레도 없었으므로, 도경이 한 일을 나는 할 수 없었다. 도경은 살릴 손이라도 있었으나, 나는 그 손마저 없었다. 사슬은 아래로 갈수록 손을 줄였다. 도경은 고를 수 있었고, 나는 고를 수 없었으며, 다음 화자는 어쩌면 볼 수조차 없을 것이었다. 사슬의 첫 손은 고르는 손이었고, 다음 손은 보는 손이었고, 그다음 손은 모르는 손일 것이었다. 한 칸 내려갈 때마다 할 수 있는 일이 하나씩 줄었다. 줄어든 끝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못 하면서 닫히기만 하는 손이었다. 나는 도경보다 한 칸 아래였으므로, 도경이 할 수 있던 한 가지를 못 했고, 다음 화자는 내가 못 하는 것을 또 하나 더 못 할 것이었다.
네 줄을 다시 보았다. 내 사번, 사서장의 사번, 두 보조의 사번. 네 줄 다 받는 이 칸이 비어 있었고, 네 줄 다 끝에서부터 차오르고 있었다. 어제는 한 줄이 두 줄이 되었고, 오늘은 두 줄이 네 줄이 되었다. 내일은 몇 줄이 될지, 단말이 받는 자리가 몇이 될지 알 수 없었다. 보존 순서에 든 자리가, 닿은 손이 있는 만큼 있었다. 가리킨 손, 거든 손, 묶은 손, 나른 손. 자료에 한 번이라도 닿은 손은 다 순서에 들었고, 순서에 든 손은 다 단말로 올라왔다. 멈추려면 순서를 멈춰야 했는데, 순서를 멈추는 길이 어디에도 없었다. 막는 길마다 막혀 있다는 것을, 네 줄이 나란히 차오르는 단말 앞에서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