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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의 깊이

Do-gyeong's Dep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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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분

사월 일일. 아침 여덟 시. 다섯째 책상 앞에 앉았다.

지하 자료실은 사월에도 겨울 냄새가 났다. 환기구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종이 사이를 지나며 마른 곰팡이 냄새를 끌고 왔고, 형광등 하나가 책상 끝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였다. 단말의 본문 칸은 그 형광등과 다른 박자로 깜빡였다. 두 깜빡임이 어긋난 채 겹치는 동안, 나는 손을 비비며 잉크가 얼지 않은 펜을 골랐다. 다섯 묶음이 떠난 책상은 가운데가 비어, 여섯째 묶음 하나가 한쪽 끝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여섯째 묶음 첫 장에는 도경의 마지막 줄이 이어져 있었다. 다섯째 묶음은 상부로 갔으나, 도경의 끝 줄은 다섯째 묶음 마지막 장에서 끊겨 여섯째 묶음 첫 줄로 건너와 있었으므로, 끊긴 자리부터 이쪽은 내 손에 남아 있었다. 도경이 어떻게 닫혔는지를 알려면, 떠나간 묶음이 아니라 이 건너온 한 줄과, 부임한 다음 날 끝까지 읽어 둔 기억을 짚으면 되었다. 도경의 깊이를 읽기로 했다. 가장 가까운 자리였고, 내가 닫혀 갈 자리와 같은 종류의 자리였다.

도경은 응답으로 닫혔다. 도경의 일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닫힘은 한 번의 누름에서 왔다. 발신칸에 한 글자를 눌러 한 줄을 고쳐 적은 일. 살리려고 한 일이었다. 그날 도경은 동기의 이름 첫 글자를 발신칸에 눌렀다고 적어 두었다. 누른 손가락이 한참 떨렸다고도 적혀 있었다. 그러나 한 줄을 살리면 다른 줄이 그만큼 자랐다. 응답은 자리를 바꾸는 일이었다. 닫힐 자리를 옮길 뿐, 닫힘의 총량은 줄지 않았다. 살린 동기의 자리가 비면 옆자리의 모르는 이름이 그 깊이를 떠안았고, 도경은 그 모르는 이름을 끝내 보지 못했다. 도경은 옮기고 또 옮기다가, 옮길 자리가 다 떨어진 끝에 제 줄에 닿았다. 살리려던 손이 마지막에 살릴 자리로 남긴 것이 제 자리였다. 응답=자리바꿈, 그 끝이 제 자리였다.

나는 응답하지 않았다. 발신칸을 누른 적이 없었다. 다만 보존했다. 묶음을 재고 날짜를 적고 설명을 옮겼다. 도경이 한 줄을 옮길 때마다 다른 줄이 자랐듯, 내가 한 묶음을 보존할 때마다 그 묶음이 자랐다. 도경의 자리바꿈이 닫힘의 총량을 옮겼다면, 내 보존은 닫힘의 총량을 옮기지도 않고 그저 늘렸다. 응답은 한 자리를 살리려다 다른 자리를 닫았으나, 보존은 살리려는 마음조차 없이 그저 닿는 자리를 자라게 했다. 도경의 문은 살리려는 손이었고, 내 문은 지키려는 손이었다. 같은 법칙의 다른 입구였다.

두 입구가 같은 곳으로 났다는 것을, 도경의 깊이를 내 깊이에 겹쳐 보며 알았다. 도경의 마지막 줄과 단말 본문 칸의 내 줄을 나란히 두고 자릿수를 맞춰 보았다. 도경의 줄은 끝에서 두 자리가 옅었고, 내 줄은 끝에서 한 자리가 비어 깜빡였다. 옅음과 빔은 다른 모양이었으나, 둘 다 끝에서부터 시작되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도경은 응답할수록 닫힐 자리가 제게 가까워졌고, 나는 보존할수록 자랄 자리가 제게 가까워졌다. 도경의 마지막 자리는 제가 옮기다 남긴 한 줄이었고, 내 마지막 자리는 제가 보존하다 자란 한 묶음일 것이었다. 도경은 옮겨도 자기·안 옮겨도 자기였고, 나는 보존해도 자기·안 보존해도 자기일 것이었다. 다른 입구로 들어왔으나, 안에서 만나는 자리는 한 자리였다. 도경의 두 옅은 자리와 내 한 빈자리가, 끝에서 안으로 같은 걸음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도경은 이제 읽히는 깊이였다. 측량기수가 깊이를 재다 그 깊이가 되었듯, 도경은 장부를 읽다 읽히는 줄이 되었고, 그 읽히는 줄을 내가 지금 읽고 있었다. 도경의 깊이를 읽는다는 것은, 도경이 잰 깊이를 다시 재는 일이었다. 그리고 재는 일은 깊이를 만드는 일이었다. 도경의 깊이를 정확히 읽을수록, 그 깊이는 한 자리씩 깊어졌다. 어제 도경의 마지막 줄이 한 자리 더 옅어졌던 것은, 내가 어제 그 줄을 짚었기 때문이었다. 읽으면 깊어지고, 깊어지면 더 읽게 되었다.

읽기를 멈추면 깊어지기도 멈출까. 도경의 줄에서 손을 떼고, 한참 짚지 않았다. 형광등이 두 번 깜빡이는 동안 눈도 그 줄에서 돌렸다. 짚지 않은 동안에는, 그리고 보지 않은 동안에는, 줄이 더 옅어지지 않았다. 측량기수의 갱이 재지 않으면 자라지 않았듯, 도경의 깊이도 읽지 않으면 깊어지지 않는 듯했다. 손을 뗀 채로 두면, 도경의 깊이를 거기서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손을 떼고 있는 동안에도 단말 본문 칸의 깜빡임은 멈추지 않았다. 도경의 줄은 내가 읽어서 깊어졌으나, 내 줄은 내가 읽지 않아도 도착하고 있었다. 도경의 깊이는 내 손에 달렸어도, 내 깊이는 내 손에 달려 있지 않았다.

거기에 두 입구의 차이가 있었다. 도경의 자리는 도경이 응답을 멈추면 거기서 멈출 자리였다. 도경은 마지막에 막지 않기로 한 손을 비워 둠으로써, 적어도 한 사람을 더 닫지는 않았다. 응답은 손가락이 발신칸을 누르는 일이었으므로, 누르지 않는 일로 멈출 수 있었다. 응답에는 멈출 자리가 있었다. 그러나 내 보존에는 멈출 자리가 없었다. 보존은 직무였다. 사서장이 부임 첫날 그 상자를 가리키며 보존하라고 했고, 상부는 보존 완료를 독촉하는 공문을 내려보냈으며, 보존 일지는 내가 적기도 전에 다음 처리 날짜를 미리 적어 두었다. 보존을 멈추면 미보존이 되었고, 미보존은 직무 불이행이었으며, 그러고도 미보존 자료마저 손대지 않은 채로 자랐다. 도경의 깊이는 내가 손을 떼면 멈췄으나, 내 깊이는 내가 손을 떼도 멈추지 않았다. 도경을 읽어 내 자리를 알려 했는데, 읽고 나니 내 자리가 도경의 자리보다 한 입구 더 깊은 곳에 있었다. 도경은 그만둘 손이라도 있었으나, 나는 그만둘 손조차 없었다.

도경의 마지막 줄을 다시 짚었다. 짚지 않으려 했으나, 짚지 않으려는 일도 그 줄을 머릿속으로 읽는 일이었다. 손끝이 닿은 종이는 차가웠고, 닿은 자리의 잉크가 손끝의 온기에 한 자리 더 묽어지는 듯했다. 한 자리 더 옅어졌다. 이번에는 그 옅어진 자리가 도경의 것인지 내 것인지를 묻지 않았다. 도경의 줄과 내 줄을 가르던 끊긴 자리가, 짚을 때마다 한 칸씩 흐려져 어디까지가 도경이고 어디부터가 나인지 표가 나지 않았다. 도경의 깊이를 다 읽으면 내 깊이를 알 줄 알았으나, 도경의 깊이가 곧 내 깊이였으므로, 다 읽을수록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깊어질 뿐이었다. 그렇다면 보존을 그만두면 어떻게 되는지, 그것만은 아직 읽지 않은 자리였다. 그 자리를 읽으러, 나는 보존하는 손을 처음으로 멈춰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