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지금 자라는 일지

The Log That Grows Now

  • 3,620자
  • ~9분

삼월 이십오일. 아침 여덟 시. 다섯째 책상 앞에 앉았다.

어제 보존 카드에 적힌 내일 날짜가 오늘이었다. 카드에는 삼월 이십오일에 보존이 끝난다고 적혀 있었고, 오늘이 삼월 이십오일이었다. 끝나는 날이 와 있었으나, 끝났다는 느낌은 오지 않았다. 책상 한쪽에 쌓아 둔 다섯 묶음은 어제 갈무리한 그대로 있었고, 갈무리한 자료는 끝난 일이어야 했다.

끝난 일을 다시 펼친 것은 이관 때문이었다. 사서장이 어제 끝나면 상부로 이관하라고 했고, 이관하려면 자료의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해 인수인계서에 적어야 했다. 인수인계서에는 자료명, 보존 상태, 마지막 기재 내용을 적는 칸이 있었다. 마지막 기재 내용을 적으려면 다섯 묶음의 마지막 장을 다시 봐야 했다.

측량기수의 묶음을 폈다. 마지막 장은 마지막 측심의 깊이에서 끊겨 있었다. 어제 그 깊이를 읽었고, 인수인계서에 그 숫자를 옮겨 적으려 했다. 옮겨 적기 전에 한 번 더 읽었다. 깊이의 끝자리가 어제 읽은 숫자와 달랐다. 한 단위 깊어져 있었다.

다시 읽었다. 잘못 읽었나 싶어 손가락으로 자릿수를 짚으며 읽었다. 첫 자리, 둘째 자리, 끝자리. 끝자리는 어제 내가 카드에 적은 깊이의 끝자리보다 한 단위 더 깊었다. 어제 갈무리해 끝난 일로 쌓아 둔 자료의 마지막 숫자가, 쌓여 있는 동안 한 단위 자라 있었다.

측량기수는 오래전에 죽은 손이었다. 갱의 깊이를 재던 그 손은 묶음 어딘가에서 한 문장 중간에 끊겼고, 끊긴 다음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적지 않은 손의 마지막 숫자가, 적는 사람이 없는데도 자라고 있었다. 옮겨 적은 잔액의 끝자리가 다음 날 늘어 있더라던 첫 묶음의 법칙은, 옮겨 적는 손이 있을 때의 법칙인 줄 알았다. 측량기수의 묶음에는 옮겨 적는 손이 없었다. 그런데도 끝자리는 자랐다.

등대수의 묶음을 폈다. 마지막 물때의 날짜에서 끊겨 있었다. 어제 그 날짜를 읽었다. 오늘 그 날짜는 하루 뒤로 가 있었다. 사서의 묶음을 폈다. 갈라진 문장의 마지막 음절에서 끊겨 있었다. 어제 그 음절을 읽었다. 오늘 그 음절 뒤에 한 음절이 더 갈라져 있었다. 전신수의 묶음을 폈다. 끊긴 전문의 사번에서 끊겨 있었다. 어제 그 사번을 읽었다. 오늘 그 사번의 끝자리가 한 단위 늘어 있었다.

네 묶음이 모두 자라 있었다. 깊이는 깊어지고, 날짜는 미뤄지고, 음절은 갈라지고, 사번은 늘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자랐으나 자란다는 점은 같았다. 어제 나는 네 묶음을 완결된 과거로 분류했다. 완결된 것은 더 자라지 않아야 완결이었다. 자라는 것은 완결이 아니라 진행이었다. 네 묶음은 과거의 자료가 아니라, 지금 자라고 있는 일지였다.

네 묶음이 자라는 방식에는 결이 있었다. 측량기수의 깊이는 아래로 자랐다. 한 단위 깊어질 때마다 마지막 측심의 숫자가 늘었고, 늘어난 숫자는 갱의 바닥이 그만큼 멀어졌다는 뜻이었다. 등대수의 날짜는 앞으로 자랐다. 한 단위 미뤄질 때마다 마지막 물때의 날짜가 하루씩 나아갔고, 나아간 날짜는 아직 오지 않은 날이었다. 사서의 음절은 옆으로 자랐다. 한 음절 갈라질 때마다 마지막 음절 뒤에 새 음절이 붙었고, 붙은 음절은 한 단어가 더 잘게 부서졌다는 뜻이었다. 전신수의 사번은 끝에서 자랐다. 깊이도 날짜도 음절도 사번도, 각자의 방향으로, 그러나 모두 마지막 자리에서 자랐다. 끊긴 자리가 자라는 자리였다.

끊긴 자리가 자라는 자리라는 것이 이상했다. 끊김은 멈춤이어야 했다. 한 문장이 중간에 끊겼으면 그 문장은 거기서 멈춘 것이고, 멈춘 것은 더 가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네 묶음의 끊긴 자리는 멈춘 자리가 아니라 자라는 자리였다. 끊김이 끝이 아니라 시작점이었다. 마지막 측심에서 갱이 더 깊어졌고, 마지막 물때에서 날짜가 더 나아갔으며, 마지막 음절에서 단어가 더 부서졌고, 마지막 사번에서 끝자리가 더 늘었다. 네 손은 거기서 멈췄으나, 네 손이 멈춘 자리는 멈추지 않았다.

다섯째 묶음을 폈다. 전임자의 마지막 줄, 전임자 사번에 내 끝자리가 붙은 한 줄. 그 줄도 자라 있었다. 내 끝자리가 한 단위 늘어 있었고, 본문 칸에서 어제 본 늘어남과 같은 늘어남이었다. 본문 칸의 내 한 줄과 다섯째 묶음의 마지막 줄이 같이 자라고 있었다. 단말 안의 줄과 종이 위의 줄이 같은 속도로.

이관 목록을 다시 보았다. 사서장이 어제 두고 간 목록에는 다섯 묶음 말고도 이관할 자료가 더 있었다. 영업정지된 회사들에서 넘어온 상자들, 정리해고로 빈자리가 된 부서들의 잔여 자료. 그 목록의 한 줄에 자금부 자료가 있었다. 자금부의 빈자리들에서 거둔 서류 묶음. 그 묶음에 강민석이라는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를 나는 알지 못했다. 자금부가 다 빈 것이 언제였는지, 그 빈자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관 목록은 한 줄로만 적고 있었다. 자금부 잔여 자료 일식. 그 한 줄도 자라고 있는지, 나는 펼쳐 보지 않았다. 펼치면 읽게 되고, 읽으면 번질 것이었다.

보존이란 자료를 자라지 않게 멈춰 두는 일인 줄 알았다. 갈무리해 쌓아 두면, 쌓인 자료는 그 상태로 멈춰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다섯 묶음은 갈무리한 다음에도 자랐고, 갈무리하는 동안 자랐으며, 갈무리하는 손이 마지막 장을 펼쳐 읽을 때마다 한 단위씩 자라는 것 같았다. 읽으면 번진다던 한 줄을, 나는 보존하려고 어제 읽었고, 오늘 그 번짐을 다섯 묶음에서 보고 있었다.

오후에 사서장이 인수인계서를 받으러 왔다. 마지막 기재 내용 칸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아직 안 적었느냐고 물었다. 적으려 했으나 자료가 자라서 적을 수가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마지막 기재 내용은 마지막에 적힌 내용이어야 하는데, 마지막이 자꾸 뒤로 갔다. 어제의 마지막과 오늘의 마지막이 달랐고, 내일의 마지막은 또 다를 것이었다. 마지막이 고정되지 않는 자료의 마지막 기재 내용을, 인수인계서는 한 칸에 한 번 적게 되어 있었다.

거의 끝났다고 또 답했다. 사서장은 거의라는 말을 어제도 들었다고 했다. 어제 거의 끝났다던 일이 오늘도 거의 끝났다면, 그 거의는 줄지 않은 거의였다. 끝이 한 단위씩 뒤로 가는 동안, 거의는 늘 같은 거리만큼 끝에서 떨어져 있었다. 깊이를 잴수록 갱이 깊어지듯, 끝을 적으려 할수록 끝이 멀어졌다.

사서장이 가고, 나는 인수인계서의 마지막 기재 내용 칸을 보았다. 비어 있었다. 비워 두는 것이 보존의 규칙인 칸이 있었고, 비울 수밖에 없는 칸이 있었다. 작성자 칸은 이름을 몰라 비웠고, 마지막 기재 내용 칸은 마지막이 멈추지 않아 비웠다. 두 빈칸이 인수인계서에 나란히 놓였다. 받는 이 없는 상자에서 시작된 빈칸이, 작성자 없는 카드를 지나, 마지막 없는 인수인계서까지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