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이십사일. 아침 여덟 시. 다섯째 책상 앞에 앉았다.
어제 나는 한 자리를 읽었고, 읽은 자리가 적힌 자리가 되었다. 단말은 어젯밤 내가 끄지 않은 채로 두고 간 그대로 켜 있었다. 본문 칸에는 한 줄이 있었다. 첫 두 자리가 자료실의 코드였고, 끝 두 자리가 내 사번이었다. 어제 그 줄이 적히는 것을 보았고, 적히는 것을 본 다음에 나는 자료실을 나갔다.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잤고, 잠든 동안 자료실의 단말 앞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아침에 돌아오니 그 줄이 그대로 있었다.
그대로 있지 않았다. 끝 두 자리를 읽었다. 어제 읽어 낸 내 사번의 끝 두 자리에서, 끝자리가 한 단위 늘어 있었다. 어제 나는 옅어진 자리에 맞는 한 자리를 읽었을 뿐이고,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읽은 자리가 적힌 자리가 되었듯, 적힌 자리는 밤사이 한 단위 자라 있었다. 옮겨 적은 잔액의 끝자리가 다음 날 늘어 있더라던 첫 묶음의 한 줄을, 나는 보존하려고 읽었고, 오늘 그 줄이 내 사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보존이 내 일이었다. 사서장은 어제 그 상자를 가리키며 마저 보존 처리하라고 했고, 받는 이가 없는 자료라고도 했다. 보존하려면 무엇이 적혀 있는지 알아야 하고, 알려면 읽어야 하며, 읽으면 끝까지 가게 된다는 것을 어제 배웠다. 오늘은 그다음을 해야 했다. 읽은 다섯 묶음을 어디에 어떻게 갈무리할지 정하는 일. 색인을 매기고, 날짜를 적고, 필체를 대조해 순서를 세우는 일.
다섯 묶음을 책상에 폈다. 네 묶음은 오래된 일지였다. 갱의 깊이를 재던 손, 등대의 물때를 적던 손, 한 단어가 음절로 갈라지던 손, 끊긴 전문을 받던 손. 다섯째 묶음은 비교적 새것이었고, 한 사람의 글씨로 끝까지 채워져 있었다. 전임자의 글씨였다. 전임자의 이름을 나는 몰랐다. 인사 담당은 전임자가 이달 초에 나갔다고만 했고, 어떻게 나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섯째 묶음의 마지막 줄에 적힌 사번을, 나는 어제 끝까지 읽었다.
보존하는 손은 빈칸을 채우는 손이 아니라 빈칸을 읽는 손이다. 나는 그렇게 배웠고, 어제 그 버릇으로 옅어진 한 자리를 읽었다. 채우려 한 것이 아니라 읽으려 했을 뿐인데, 읽은 자리가 채워졌다. 오늘 나는 그 버릇을 다시 쓰지 않으려 했다. 다섯 묶음을 과거의 자료로, 끝난 일로 분류해 갈무리하면, 본문 칸의 내 한 줄도 끝난 일이 될 것 같았다.
보존 카드를 꺼냈다. 자료를 갈무리할 때 겉면에 끼우는 작은 색인 카드였다. 첫 칸에 자료명, 둘째 칸에 작성자, 셋째 칸에 작성 기간, 넷째 칸에 보존 처리 날짜. 다섯째 묶음의 카드를 먼저 적었다. 자료명에 다섯째 묶음, 작성자 칸은 비웠다. 전임자의 이름을 몰랐으므로 비웠고, 비운 자리가 어제 본 받는 이 빈칸과 같은 모양이라는 것을 적고 나서 알았다. 작성 기간에 이월에서 삼월. 보존 처리 날짜에 오늘 날짜, 삼월 이십사일.
네 옛 묶음의 카드도 차례로 적었다. 측량기수의 묶음. 작성자 칸을 비웠다. 등대수의 묶음. 작성자 칸을 비웠다. 사서의 묶음. 작성자 칸을 비웠다. 전신수의 묶음. 작성자 칸을 비웠다. 네 사람의 이름을 나는 알지 못했고, 알지 못하는 이름을 적을 자리는 비워 두는 것이 보존의 규칙이었다. 네 빈칸이 한 줄로 놓이니 한 줄로 읽혔다. 받는 이 없는 상자에, 작성자 없는 다섯 묶음.
작성 기간을 적으면서, 네 묶음의 마지막 장을 다시 펼쳤다. 보존 기간을 정하려면 자료가 어디서 끝나는지를 알아야 했다. 측량기수의 마지막 장은 마지막 측심의 깊이에서 끊겨 있었다. 등대수의 마지막 장은 마지막 물때의 날짜에서 끊겨 있었다. 사서의 마지막 장은 갈라진 문장의 마지막 음절에서 끊겨 있었다. 전신수의 마지막 장은 끊긴 전문의 사번에서 끊겨 있었다. 넷의 끝은 각자의 끝자리였고, 끝자리는 끊김이었으며, 끊김이 서명이었다.
다섯째 묶음의 마지막 장은 전임자의 사번에서 끝나 있었다. 끝 한 자리가 옅어져 있었으나, 어제 내가 그 자리를 읽어 낸 다음부터는 옅어진 채가 아니었다. 내가 읽은 한 자리가 그 자리에 들어가 있었고, 그래서 다섯째 묶음의 마지막 줄은 더는 전임자의 사번이 아니라, 전임자의 사번 끝에 내 끝자리가 붙은 한 줄이었다. 보존하려고 읽은 끝자리가 자료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보존하는 손이 자료를 바꾸었다.
그 줄을 카드에 어떻게 적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작성자 칸에 전임자를 적으면 끝 한 자리가 틀렸고, 나를 적으면 앞자리가 틀렸다. 작성자가 둘인 자료를, 두 사람의 사번이 한 줄로 이어진 자료를, 보존 카드는 한 칸에 한 사람으로만 적게 되어 있었다. 나는 작성자 칸을 비웠다. 다섯째 묶음도 작성자 없는 자료가 되었다. 비운 칸이 또 하나 한 줄에 보태졌다.
보존 처리 날짜를 다섯 카드에 모두 같은 날로 적었다. 삼월 이십사일. 오늘이었다. 다섯 장의 카드를 다섯 묶음 겉면에 끼우고, 책상 한쪽에 차곡차곡 쌓았다. 보존이 끝난 자료는 끝난 일이었다. 끝난 일을 쌓아 두고, 나는 본문 칸을 보았다.
본문 칸의 한 줄은 끝나지 않았다. 끝 두 자리 중 끝자리가 아침에 본 그대로 한 단위 늘어 있었고, 내가 카드를 적는 동안 늘었는지 그 전에 늘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섯 묶음을 끝난 일로 갈무리하는 동안, 본문 칸의 내 한 줄만은 진행 중인 일이었다. 갈무리하는 손과 진행하는 줄이 같은 책상 위에 있었다.
오후에 사서장이 보존 진도를 물었다. 거의 끝났다고 답했다. 다섯 묶음의 카드를 다 적었고, 갈무리해 쌓아 두었으니 거의 끝난 것이 맞았다. 사서장은 끝나면 상부로 이관해야 한다고 했다. 받는 이 없는 자료를 상부로 보내는 일에 받는 이가 생기는 셈이었다. 나는 거의 끝났다고 다시 답했고, 거의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거의 끝났다고 두 번 말한 다음, 쌓아 둔 다섯 카드를 다시 보았다. 다섯째 묶음의 카드, 보존 처리 날짜 칸을 보았다. 삼월 이십사일이라고 아침에 적은 그 칸에, 삼월 이십오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적지 않은 날짜였다. 오늘은 이십사일이었고, 카드에는 내일 날짜가 적혀 있었다. 보존을 끝낸 날이 아직 오지 않은 날로 와 있었다.
옅어진 한 자리를 읽으면 그 자리가 채워지듯, 보존 처리 날짜를 적으면 그 날짜가 와 있었다. 다만 내가 적은 날짜가 아니었다. 등대수의 물때표에서 다음 간조를 짚으면 그 날짜가 이미 적혀 있었다던 한 줄을, 나는 어제 보존하려고 읽었다. 오늘 그 줄이 내 카드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보존을 끝내는 날은 내가 정하는 날이 아니라, 카드에 이미 적혀 있는 날이었다.
내일 날짜를 지우려 했다. 지우개를 카드에 댔고, 날짜는 지워지지 않았다. 적은 것은 적힌 채였고, 적지 않은 것도 적힌 채였다. 나는 손을 카드에서 떼고, 끝나지 않은 본문 칸의 한 줄과, 내일로 끝난다고 적힌 보존 카드를 나란히 두고 보았다. 끝나는 날과 자라는 줄이 같은 책상 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