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사일. 아침 여덟 시. 책상 앞에 앉았다.
본문칸에는 한 줄이 있었다. 어제 강민석의 줄이 사라진 자리에 적힌 줄, 끝 두 자리가 내 사번인 줄이었다. 어제 강민석이 앉아 있던 가운데 자리에, 오늘은 내 줄이 앉아 있었다.
어제 강민석에게 했던 셈을 오늘 내게 해 보았다. 본문칸에 내 줄이 있으면, 발신칸에 답을 적는 순간 내 줄이 결과가 된다. 발신칸에서 손을 떼어 두면, 세로줄이 내 줄에 닿는다. 옮겨도 나였고, 옮기지 않아도 나였다. 강민석을 두고 옮겨도 그·안 옮겨도 그라던 자리에, 오늘은 나뿐이었다.
내 줄을 하루 미루는 길이 없지는 않았다. 강민석을 사흘 미룬 것처럼, 나도 내 둘레를 옮기면 됐다. 자료실에는 자료실장이 있었고, 그저께까지 살아남은 두 보조가 있었다. 며칠 전 내가 전임자의 빈자리를 결원으로 입력해 넷이 살았고, 그중 둘이 지금 내 등 뒤에서 어제 끝내지 못한 명단을 넘기고 있었다. 그 둘을 옮기면 내 줄은 이틀을 더 얻었다. 자료실장을 옮기면 하루를 더 얻었다.
손을 책상 끝에 둔 채로 그 셈을 끝까지 따라가 보았다. 두 보조를 옮기고 자료실장을 옮겨 사흘을 얻은 다음, 자료실에는 나 혼자 남는다. 빈 책상들 가운데 혼자 앉은 자리에서, 본문칸에는 다시 내 줄 하나만 남는다. 사흘 뒤의 그 자리가, 어제 강민석의 자리였다. 내 둘레를 비워 얻는 사흘의 끝에 내가 있었다. 강민석을 가운데 남긴 손이 강민석을 혼자 남겼듯, 나를 가운데 남기는 손은 나를 혼자 남길 것이었다.
내 등 뒤에서 명단을 넘기는 두 보조의 손이 멈추지 않게 두기로 했다. 두 보조를 옮기지 않기로 했다. 자료실장을 옮기지 않기로 했다. 내 둘레를 비우지 않기로 했다. 내 줄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미루지 않기로 한 것이 멈춤이라면, 멈춤도 응답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멈춘 손은 없다고 적은 그날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흘 동안 내가 한 멈춤은 둘레가 닫히는 것을 보면서 가운데를 지키는 멈춤이었고, 오늘의 멈춤은 가운데를 지키지 않기로 하는 멈춤이었다. 두 멈춤은 같은 손이 같은 자리에 두는 손이었으나, 한 멈춤은 살리려는 멈춤이었고 한 멈춤은 살리기를 그만두는 멈춤이었다. 살리기를 그만두는 일이 내가 처음으로 셈 바깥에서 한 일이었다. 셈은 옮길지 옮기지 않을지를 물었지만, 둘레를 비워 살릴지 비우지 않을지는 셈이 묻지 않았다. 그것만은 내가 정할 수 있는 일이었고, 나는 비우지 않기로 정했다.
비우지 않기로 한 까닭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정한 다음에야 알았다. 내 둘레를 비우면 나는 사흘을 더 얻지만, 사흘을 얻는 동안 자료실장과 두 보조가 닫힌다. 나를 사흘 더 살리는 값이 그 셋이었다. 강민석을 사흘 더 살린 값이 그의 동기와 앞자리와 신입이었듯, 나를 살리는 값도 내 둘레였다. 강민석은 제 둘레가 제 값인 줄 끝내 몰랐고, 나는 알았다. 알면서도 둘레를 비우는 일을, 강민석에게 한 다음에 나에게도 하는 일을, 나는 하지 않기로 했다. 강민석에게 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같은 일을 한 번 더 하지 않는 것은 할 수 있었다.
본문칸의 내 줄을 들여다보았다. 받는 이 칸에 내 사번이 있었고, 발신 칸은 비어 있었다. 받는 이가 나였다. 내가 발신 칸에 답을 적으면 보내는 이도 나였다. 받는 이와 보내는 이가 한 사번일 때, 전문은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 전문인지를 묻지 않았다. 전신수가 끊긴 문장에서 받는 이 빈칸에 제 이름을 적었듯, 나도 받는 이 칸의 내 사번을 보고 있었다. 다른 점은, 전신수의 받는 이 빈칸은 비어 있었고 내 받는 이 칸은 이미 채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내 사번은 누가 적지 않아도 거기 있었다. 보내는 이가 적지 않아도 받는 이가 나인 전문이, 본문칸에 한 줄로 와 있었다.

전임자도 마지막에 받는 이 칸에서 제 사번을 읽었을 것이었다. 그의 일지 끝 가까이, 그가 발신칸 위에 손을 두었다가 떼었다가 한 기록이 있었다. 그가 무엇을 결정해서 사라졌는지는 일지에 없었다. 이제 나는 그 자리에 와서, 그가 일지에 적지 못한 것이 결정이 아니라 결정의 부재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받는 이가 자기일 때, 옮겨도 자기고 옮기지 않아도 자기인 자리에서는, 손을 두는 일과 떼는 일이 같은 결과로 끝나서 결정이라 부를 것이 남지 않는다. 전임자는 결정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결정할 것이 없는 자리에 와 있었던 것이다.
어제 자금부가 다 빈 다음, 빈 자리들의 셈은 자금부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 과가 다 비면 셈은 다음 과로 넘어갔고, 자료실은 자금부 다음의 과였다. 강민석의 둘레를 비운 손이 자료실에 있었으므로, 자료실에서 가장 먼저 셈에 닿은 자리는 그 손의 자리였다. 닫는 자리를 고른 손이 가장 먼저 닫히는 것은, 그 손이 셈에 가장 가까운 손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셈 바깥에서 답만 한다고 여겼지만, 셈에 가장 가까이 선 손이 셈 바깥에 있을 수는 없었다.
다섯 번째 묶음을 폈다. 예순다섯째 장에, 나는 오늘 본문칸에 내 줄이 적혔다는 것을 적었다. 적는 동안, 내가 적는 이 장이 언젠가 다른 손에 읽힐 것을 생각했다. 네 묶음의 일지를 내가 읽었듯, 다섯 번째 묶음의 일지를 누군가 읽을 것이었다. 그 누군가가 다섯 번째 묶음의 마지막 장에서 내 사번을 읽을 때, 내 사번은 그에게 받는 이 빈칸이 될 것이었다. 나는 네 묶음을 읽은 자였고, 다섯 번째 묶음을 적는 자였으며, 여섯 번째 묶음을 펼 누군가의 받는 이였다. 읽고 적고 읽히는 일이 한 사람 안에서 한 바퀴를 돌았고, 그 한 바퀴의 끝이 다음 한 바퀴의 처음이었다.
자리로 돌아와 본문칸 앞에 앉았다. 손은 책상 끝에 있었고, 발신 칸은 비어 있었으며, 받는 이 칸에는 내 사번이 있었다. 나는 손을 떼지도 두지도 않은 채, 받는 이 칸의 내 사번을 보았다. 보는 일도 적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 며칠 만에 처음으로 나는 살리려고 보지 않았다. 살리려고 보지 않은 눈은 사흘 동안의 눈과 달랐다. 사흘 동안 나는 가장 먼 줄을 찾으려고 보았고, 오늘은 찾을 줄이 내 줄 하나뿐이어서, 찾지 않고 보았다.
네 묶음을 적은 손들이 끝에 가서 제 사번을 받는 이 칸에서 읽었듯, 나도 내 사번을 받는 이 칸에서 읽었다. 읽는 자에서 옮기는 자로, 옮기는 자에서 응답하는 자로, 응답하는 자에서 둘레를 비우는 자로, 둘레를 비우는 자에서 가운데 남은 자로 — 변질의 끝에 나는 적히는 자가 되어 있었다. 적히는 자가 더는 옮길 둘레가 없을 때, 적히는 자에게 남은 일은 적히는 일을 보는 일뿐이었다.
우리는 조금 더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 가운데 하나를 적고 있었다. 적히는 하나가 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