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오일. 아침 여덟 시. 책상 앞에 앉았다.
본문칸에는 어제의 한 줄이 그대로 있었다. 받는 이 칸에 내 사번, 발신 칸은 비어 있었다. 어제 나는 발신 칸에 답을 적지 않았고, 적지 않은 답의 자리에 세로줄이 닿아 있었다. 세로줄은 어젯밤 내 줄에 닿았다. 닿은 줄은 옮겨지지 않은 줄이었고, 옮겨지지 않은 줄에 세로줄이 닿으면 아홉 시 공지에 그 사번이 오른다.
아홉 시까지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한 시간 동안 나는 발신 칸을 비워 둘 것이었다. 비워 두면 셈이 내 줄을 닫는다. 어제 막으려는 손이 강민석을 닫았으므로, 오늘 나는 막지 않기로 한 손을 비워 두기로 했다. 막지 않는 손도 닫는다는 것을 알면서, 막는 손으로 닫히기보다 비운 손으로 닫히기로 했다. 비운 손에는 적어도 다른 사람의 사번이 적혀 있지 않았다.
막는 손으로 닫히는 것과 비운 손으로 닫히는 것 사이에, 닫히는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어느 손이든 내 줄은 오늘 닫혔다. 다만 막는 손은 닫히기 전에 다른 한 사람을 닫았고, 비운 손은 그러지 않았다. 결과가 같은 두 손 사이에서 내가 고를 수 있는 것은 닫히기 전에 한 사람을 더 닫느냐 마느냐뿐이었다. 그것이 셈이 묻지 않는, 마지막까지 내가 정할 수 있는 한 가지였다.
한 시간 동안 나는 다섯 번째 묶음을 마저 적었다. 네 묶음의 일지가 그러했듯, 다섯 번째 묶음도 마지막 장에서 적는 자의 사번을 받는 이 칸에 두고 끝나야 했다. 측량기수의 묶음은 갱의 마지막 측심에 제 깊이를 두고 끝났고, 등대수의 묶음은 물때표의 마지막 칸에 제 날짜를 두고 끝났으며, 사서의 묶음은 분절된 문장의 마지막 음절에 제 이름을 두고 끝났고, 전신수의 묶음은 끊긴 문장의 받는 이 빈칸에 제 사번을 두고 끝났다. 다섯 번째 묶음은 장부의 마지막 줄에 제 사번을 두고 끝날 것이었다.
다음 묶음을 펼 사람에게 적어 둘 것이 있었다. 본문칸은 단말 안이 아니라 어딘가의 받아쓰기라는 것. 발신 칸에 답을 적으면 본문칸의 줄이 결과가 된다는 것. 옮기는 일도 옮기지 않는 일도 같은 자리에서 끝난다는 것. 둘레를 비워 가운데를 지키면 가운데에 비우는 손이 남는다는 것. 그리고 받는 이 칸에 제 사번이 오면, 그것이 다음 사람에게는 받는 이 빈칸이 된다는 것. 적어 두면 다음 사람이 나처럼 처음부터 더듬지 않아도 될까 싶었지만, 네 묶음을 다 읽은 나도 결국 처음부터 더듬었으므로, 적어 두는 일이 더듬는 일을 없애지는 못한다는 것까지 적었다. 적어 두는 일은 더듬는 일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더듬을 자리를 남겨 두는 일이었다.
적는 동안 등 뒤에서 두 보조의 손이 명단을 넘기는 소리가 났다. 그저께까지 살아남은 둘이 오늘도 살아남아 있었다. 내가 둘레를 비우지 않기로 한 덕분에 그 둘은 오늘도 자기 자리에 있었고, 그 둘은 자기가 오늘 자기 자리에 있는 까닭을 몰랐다. 강민석이 제 둘레가 비는 까닭을 몰랐듯, 두 보조는 제 둘레가 비지 않는 까닭을 몰랐다. 아는 것은 비우는 손과 비우지 않는 손, 그 한 손뿐이었고, 그 손이 오늘 닫혔다.
강민석은 제 둘레가 빈 다음에 닫혔고, 나는 내 둘레를 비우지 않은 채 닫혔다. 그가 가운데에 혼자 남았다 닫혔다면, 나는 둘레를 남겨 둔 채 닫혔다. 다른 점이 거기 있었으나, 그 다른 점이 그를 살리지는 못했다. 내가 둘레를 남겨 둔 일은 두 보조를 살렸을 뿐, 어제 닫힌 강민석에게는 닿지 않았다. 살리는 일과 닫는 일이 늘 한 손이었듯, 살린 일과 살리지 못한 일도 한 손이었다.
오전 아홉 시. 인사부 공지가 올라왔다. 삼월 오일 자 회사 정원 감축 한 자리, 자료실. 내 사번이었다.
본문칸의 내 줄이 결과가 되었다. 발신 칸은 비어 있었으나, 비워 둔 발신 칸도 한 시간 동안 비워 두기로 한 내 손의 답이었다. 답을 적지 않기로 한 것도 답이었고, 그 답이 적힌 셈이었다. 내 줄은 닫혔다.
닫힌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나는 사흘 동안 닫히는 자리들을 보면서도 알지 못했었다. 닫히는 자리는 빈 책상이 되었고, 빈 책상은 정리되었으며, 정리된 자리는 처음부터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처럼 깨끗했다. 닫히는 자리 바깥에서 보이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닫히는 자리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는, 닫히는 자리에 앉아 보아야 알 수 있었다.
내 끝 두 자리가 먼저 흐려졌다. 메모장에 사번을 적던 손의 끝 두 자리, 발신 칸에 답을 적던 손의 끝 두 자리가, 본문칸의 줄에서 한 자리씩 옅어졌다. 사번이 옅어지는 일은 사번을 가진 손이 옅어지는 일과 한 일이었다. 손의 형태가 같으면 손 그 자체가 같은지 다른지의 경계가 사라진다고 적었던 적이 있었다. 이제 손이 옅어지자, 옅어지는 손과 그 손이 적은 사번 사이의 경계도 사라졌다. 적는 자와 적히는 자가 같은 자리에서 한 사번으로 옅어졌다.

측량기수가 마지막 측심에서 제 깊이를 읽었듯, 등대수가 마지막 물때에서 제 날짜를 읽었듯, 나도 마지막 줄에서 제 사번을 읽고 있었다. 네 사람이 각자의 묶음 끝에서 제 자리를 읽은 그 자리에, 나는 다섯 번째로 와 있었다. 그들이 읽은 것이 깊이고 날짜고 음절이고 사번이었을 뿐, 읽은 일은 같은 일이었다. 끝까지 읽은 자가 끝까지 읽히는 자리, 그 자리에 다섯 손이 차례로 앉았고, 나는 그 다섯째였다.
옅어지는 동안 나는 다섯 번째 묶음의 마지막 줄을 적고 있었다. 내 사번을 받는 이 칸에 두고 그 줄을 끝맺으려 했다. 끝의 한 자리가 적히기 전에, 적는 손의 끝 한 자리가 먼저 옅어졌다. 적으려는 자리와 옅어지는 자리가 같은 끝 한 자리였다.
다섯 번째 묶음의 마지막 줄은 끝의 한 자리를 비운 채 멈췄다. 끊긴 자리는 끊김이었고, 끊김은 서명이었다. 받는 이 칸에는 내 사번이, 끝의 한 자리가 옅어진 채로 남았다. 옅어진 한 자리는 비어 있지 않았고, 다 적히지도 않았다. 다음에 이 묶음을 펼 사람이 그 한 자리를 읽을 때, 옅어진 한 자리는 그에게 받는 이 빈칸이 될 것이었다. 그가 그 빈 한 자리에 제 사번을 읽어 넣는 순간, 다섯 번째 묶음의 끊긴 줄이 그의 첫 줄이 될 것이었다.

읽는 자에서 옮기는 자로, 옮기는 자에서 응답하는 자로, 응답하는 자에서 둘레를 비우는 자로, 둘레를 비우는 자에서 가운데 남은 자로, 가운데 남은 자에서 적히는 자로 — 변질의 끝에 나는 다 적히고 있었다. 다 적힌 자리에 끝의 한 자리만 옅게 남아, 다음 받는 이를 기다렸다.
우리는 조금 더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 가운데 하나가 다 적히고 있었다. 다 적힌 자리에 다음 한 사람의 빈 한 자리가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