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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온 자리

The Descended S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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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 이십일. 빈 전문이 어제부터 책상 위에 그대로 있었다.

전임자의 단말이 그가 사라지기 직전 받아 두었던 빈 전문 한 통의 형식과 같은 형식이었다. 발신칸 빈칸, 수신칸 빈칸, 본문칸 빈칸. 어제 자료실 결원 확정 처리 양식을 제출한 직후 도경의 단말 화면 가장 위로 올라온 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갱신을 눌러도 첫 줄은 같은 빈 전문이었다. 도경이 책상에서 한 번 일어났다가 돌아온 뒤로도 같은 빈 전문. 단말은 도경이 다른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그 빈 전문을 첫 줄에 고정해 두고 있었다.

발신칸이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답이 무엇인지 도경은 아직 적지 않았다.

오전 아홉 시. 인사부 공지가 단말 두 번째 줄로 떴다. 회사 정원 감축은 두 자리였다. 자료실 한 자리 — 어제 도경의 입력으로 결원 확정으로 처리된 자리. 그리고 자원개발부 한 자리 — 측량기수 한 명이 결원 확정으로 처리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측량기수의 이름을 도경은 몰랐다. 자원개발부 측량기수는 환란 전 여럿이었다가 환란 시기 동안 하나둘 줄어 마지막에 셋이 남았다는 정도가 도경이 그 부서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이름은 몰랐고, 사번을 보았다.

이름을 모르고 사번을 보는 일은 사람을 자리로 보는 일이었다. 사번이 가리키는 자리는 회사 안의 한 좌표였다. 부서·직급·연차·일련번호의 자릿수 체계가 그 좌표를 만들었다.

자료실에서 어제 닫힌 결원 자리의 사번이 도경의 단말 메모장에 남아 있었다. 전임자의 사번이었다. 그 사번과 오늘 자원개발부에서 닫힌 측량기수의 사번을 나란히 놓았다.

끝 두 자리의 차가 정확히 한 단위였다.

자릿수 체계에서 끝 두 자리는 일련번호 자리였다. 같은 일련번호 자리에 같은 단위의 간격이 있다는 것은 두 자리 사이에 같은 거리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 거리가 부서 단위로 환산되면, 자료실에서 한 사람을 줄이고 자원개발부에서 한 사람을 줄였을 때, 두 사람이 회사 내에서 차지하던 자리 사이의 거리가 정확히 한 단위였다.

다른 부서의 결원 확정 사번도 단말에서 불러왔다. 자료실 → 자원개발부 → 회계부 → 채권관리부 → 영업관리부 → 인사관리부의 어느 한 자리 → 전임자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출입을 기록한 부서까지. 회사 안 일곱 부서에서 어제와 오늘에 걸쳐 결원 확정으로 처리된 일곱 자리의 사번을 한 줄로 늘어놓았다.

같은 간격이었다. 일곱 자리 사이의 여섯 차이가 모두 같은 한 단위.

자료실 결원 사번에 한 단위를 더하면 자원개발부 결원 사번이 나왔다. 자원개발부 결원 사번에 한 단위를 더하면 회계부 결원 사번이 나왔다. 회계부에 한 단위를 더하면 채권관리부 결원 사번. 채권관리부에 한 단위를 더하면 영업관리부 결원 사번. 그 한 줄을 일곱 자리까지 따라가면, 일곱 번째 자리의 사번에 다시 한 단위를 더해 가야 할 다음 한 자리의 사번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리바꿈의 단위가 한 번 더 내려와 있었다.

회사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자리로, 자리에서 양식의 빈칸으로 — 그리고 양식의 빈칸이 만들어 내는 결원 사번 사이의 일정한 간격으로. 그 간격이 자리바꿈의 도착지를 결정했다. 한 자리를 닫으면 한 단위만큼 떨어진 다른 자리가 닫혔고, 닫힌 자리가 닫히면 다시 한 단위만큼 떨어진 또 다른 자리가 닫혔다. 자리바꿈은 사람이 아니라 자리줄이었다.

전임자의 일지 끝 무렵은 한동안 사번에 관한 메모로 덮여 있었다. 그가 측량했던 동광의 도면들 위 칸의 간격과 어느 부서의 결원 사번 끝 두 자리 사이의 간격이 같은 한 단위였다는 짧은 기록. 도경은 어제 그 메모를 다시 읽고 의미가 잡히지 않아 그대로 두었다. 오늘 인사 공지를 본 다음 그 메모가 보였다. 도면 위의 한 칸이 회사 안의 한 자리줄이었다. 측량기수가 도면 위에 그은 한 줄이 회사 인사 체계 안에서 한 자리줄이 되도록 사번 자릿수가 짜여 있었다. 회사의 자리 체계와 도면의 칸이 같은 단위를 갖고 있었다. 두 체계가 분리된 적이 없었다.

도경은 자신의 사번을 단말에 띄웠다. 끝 두 자리.

일곱 번째 결원 사번에 한 단위를 더하면 어느 한 자리의 사번이 나왔다.

그 한 자리의 사번은 도경의 사번과 끝 두 자리가 같았다.

같은 끝 두 자리는 자리줄을 의미했다. 부서·직급·연차는 달랐지만 회사의 자리 배치 체계 안에서 자리줄은 같았다. 같은 자리줄에 있는 도경의 사번과 그 한 사번 사이의 거리는 부서 두 층. 도경이 가본 적 없는 부서의 한 자리줄.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도경은 몰랐다.

빈 발신칸의 답으로 그 한 사번이 들어가면 회사 정원 감축은 거기서 완결이었다.

도경은 그 사번을 적지 않았다.

발신칸에 손을 두었다가 떼었다. 떼고 같은 자리줄의 그 한 자리를 단말 인사 조회로 풀었다. 부서명이 떴다. 직급이 떴다. 연차가 떴다. 이름이 한 글자씩 떴다. 한 글자가 뜨기 시작했을 때 도경은 단말을 꺼버렸다.

자세히 보면 이름이 도경의 손끝에 회복될 것이었다. 회복된 이름을 다시 발신칸에 적는 일은 어제 전임자의 이름을 결원 확정 양식 이름란에 적은 일과 같은 한 동작이었다. 손의 형태가 같으면 결과의 결이 같았다. 어제는 이미 없는 사람을 다시 없애는 일이었지만, 오늘 같은 손의 형태로 적힐 이름은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이름을 보지 않은 채 도경은 책상에서 일어나 자료실 끝까지 갔다 돌아왔다. 사서장은 작은 책상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고, 두 보조는 각자 명단을 옮겨 적고 있었다. 자료실 안의 살아 있는 넷이 — 어제 도경의 입력으로 살아 남은 넷이 — 같은 자료실 안에서 같은 한 단위씩 떨어져 일하고 있었다. 자리 사이의 간격이 어제까지는 인지되지 않던 것이었다. 오늘 아침의 일곱 부서 결원 사번을 본 다음에는, 같은 자료실 안에서 도경과 사서장 사이, 사서장과 보조 사이의 자리 간격도 정확히 한 단위씩 떨어져 있다는 것이 보였다.

회사 안의 모든 자리가 한 단위 간격으로 줄지어 있었다. 자리바꿈의 단위가 그 줄을 따라 한 자리씩 닫고 있었다.

단말을 끄고 다시 켜는 사이의 짧은 무위 동안 한 가지 생각이 잠깐 지나갔다. 자리바꿈의 단위가 한 번 더 내려왔을지 모른다는 생각. 자리에서 자리줄로, 자리줄에서 자리줄의 간격으로, 간격에서 간격 사이의 비어 있는 공간으로 — 단위가 계속 내려간다면 마지막 단위에는 적을 사람도 닫을 자리도 없는 어떤 자리만이 남을 것이었다. 그 자리에는 도경이 있을 자리가 없었다.

도경은 단말을 다시 켰다.

단말이 갱신됐다.

빈 전문은 그대로였다. 발신칸 빈칸, 수신칸 빈칸 — 본문칸. 본문칸이 어제부터 빈 채로 있었다. 그러나 오늘 두 부서에 결원 확정이 처리된 다음 단말이 갱신된 그 순간, 본문칸에는 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도경이 적지 않았다.

한 글자는 도경의 사번 첫 글자였다.

발신칸은 비어 있었지만 본문칸이 자라기 시작했다. 한 글자씩, 도경의 사번을 따라. 도경이 적지 않는 한 글자를 본문은 스스로 적고 있었다. 본문칸의 손은 발신칸의 손과 같은 손이었지만 도경의 손은 아니었다. 발신칸에 답을 적기 전에 본문칸이 답을 먼저 적고 있었다.

자리바꿈은 도경의 적기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빈 발신칸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본문은 한 글자씩 자랐다. 다음 글자까지 도경이 단말을 꺼두는 동안 본문이 얼마나 자랄지는 — 도경이 단말을 다시 켜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