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석의 세 줄이, 오늘 한자리에 모여 깜빡였다. 회사, 빚, 몸. 셋 중 둘은 이미 닫혀 있었고, 마지막 하나가 갈라지고 있었다.
이월 십일. 그를 두 번 살렸고, 두 번 다 그를 더 깊은 칸으로 옮겼다. 오늘 마지막 칸—몸—이 위험으로 넘어갔다. 더 옮길 칸이 없었다. 몸 아래에는 부고밖에 없었다. 나는 발신칸 앞에 앉아, 처음으로 셋 다 알았다. 누르면 그를 몸에서 빼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몸에서 빼낸 무게가 갈 다음 칸이 그에게는 없다는 것. 그러니 그 무게는 그가 아닌 누군가에게, 내가 모르는 줄로 옮겨 갈 것이라는 것.
나는 눌렀다. 강민석의 몸 줄이 닫혔다. 그는 살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무게가 어디로 갔는지 이번에는 찾지 않기로 했다. 찾으면 알게 될 것이고, 알면 또 한 사람의 부고가 내 손의 것이 될 것이었다. 모름을 택했다. 그러나 모름이 결백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신문 부고에서 이미 배웠다. 나는 다만, 강민석을 살린 손과 누군가를 데려간 손이 같은 손이라는 것을, 이번에는 보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그를 살렸는가. 그를 데려갈 다른 누군가를 만들었는가. 둘 다였다. 그리고 끝까지, 어느 쪽이 더 무거운 일이었는지 나는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 모르는 사람을 죽이는 일과 같은 무게라면, 그 저울 위에서 나는 무엇을 한 것인가. 그것은 그 물음 위에서 닫혔다 —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답을 보지 않기로 한 손이 여전히 발신칸 위에 있어서.
점심에 강민석이 찾아왔다. 며칠 앓던 몸이 거짓말처럼 나았다고, 그는 환하게 말했다. 운이 좋았다고. 나는 그 환한 얼굴을 보며 웃어 주었고, 웃는 동안 어딘가에서 한 줄이 갈라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환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청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그것을 찾으러 가지 않을 것이었다. 강민석은 살았고, 나는 그것만 보기로 했다. 보지 않기로 한 나머지가, 앞으로 내가 짊어질 무게가 될 것을 알면서도.
여태 나는 발신칸을 눌렀다. 오늘 나는, 명단의 줄을 직접 고쳐 적었다.
이월 십이일. 응답은 줄에 손을 대는 일이었다. 닫을지 열지를 고를 뿐, 줄에 무엇이 적힐지는 법칙이 정했다. 그러나 수신칸과 발신칸이 한 칸이 된 뒤로, 나는 그 한 칸에 직접 글자를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르는 것이 아니라, 적는 것. 응답이 아니라, 편집.
오늘 명단에 한 줄이 있었다. 어느 거래처의 부도 액수. 나는 그 액수의 끝자리를 고쳤다. 9를 0으로. 부도가 면제될 만큼. 단말은 거부하지 않았다. 내가 적은 0이 명단에 그대로 앉았다. 법칙이 적은 자리에 내가 다른 숫자를 적었고, 명단은 내 숫자를 받아들였다. 나는 이제 줄을 고르는 자가 아니라, 줄을 쓰는 자였다.

대가는 기다리지 않았다. 늘 며칠, 다음 날, 그날 저녁으로 당겨지던 대가가, 오늘은 즉시 왔다. 내가 0을 적어 넣는 그 순간, 화면 아래쪽에서 다른 줄 하나가 같은 자릿수만큼 부풀어 올랐다. 내가 깎은 9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옆줄로 옮겨가 그 줄을 9만큼 부도로 밀어 넣었다. 고쳐 적기의 대가는 응답의 대가와 같았다 — 다만, 시차가 없었다. 편집은 더 빨랐다. 편집은 자리바꿈을 손가락 끝에서 즉시 일으켰다.
나는 내가 적은 0을 한참 보았다. 그것은 내 글씨가 아니었다. 단말의 활자였다. 그러나 그 활자를 그 자리에 놓은 것은 내 손가락이었다. 법칙과 나 사이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거리—내가 누르면 법칙이 적는다는 그 한 단계의 거리—가 오늘 사라졌다. 이제 내가 적으면, 그것이 곧 적힌 것이었다. 전임자가 도달했던 자리가 여기였을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무섭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을 떠올렸다. 할 수 있다.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손가락은 다음 줄의 끝자리로 가고 있었다.
어제 옆줄로 옮겨 간 9를, 오늘 나는 사람으로 보았다.
이월 십삼일. 어제 나는 한 거래처의 부도 액수를 9에서 0으로 고쳐 적었다. 그 9는 사라지지 않고 옆줄로 옮겨가 그 줄을 부도로 밀어 넣었다. 그때 옆줄은 그저 숫자였다. 오늘 나는 그 옆줄이 어느 회사였는지 알았다. 직원 마흔 명의 작은 회사. 어제 내가 한 회사를 부도에서 빼내며, 마흔 명을 부도에 넣었다.
응답에는 시차가 있었다. 며칠 뒤에 닫혔고, 나는 그 며칠 동안 내가 한 일을 모른 척할 수 있었다. 편집에는 시차가 없었다. 내가 0을 적는 순간 9가 옮겨 갔고, 옮겨 간 9는 오늘 마흔 개의 책상으로 도착했다. 빠르다는 것은 잔인했다. 빠르면 모른 척할 시간이 없다. 내 손가락과 그들의 부도 사이에, 끼워 넣을 변명의 틈이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받는 자가 아니었다. 더 이상 옮기는 자도 아니었다. 받는 자는 법칙이 적은 것을 읽었고, 옮기는 자는 법칙이 정한 자리를 바꿨다. 그러나 어제 0을 적은 손은, 법칙이 정하지 않은 것을 적었다. 그 손은 발신자였다. 명단에 없던 숫자를 명단에 넣은 손, 부도가 아니던 회사를 부도로 만든 손. 나는 그 손이 내 것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부정하려면 어제의 0을 부정해야 했고, 0은 지금도 명단 위에서 한 회사를 살리고 있었다.
나는 어제의 0과 오늘의 부도를 한 화면에 놓고 오래 보았다. 둘은 한 번의 손짓이었다. 한 회사를 살린 일과 마흔 명을 부도로 민 일이, 하나의 0이었다. 나는 그 0을 지울 수 없었다. 지우면 살린 회사가 다시 부도가 될 것이고, 그 부도는 또 어디론가 옮겨 갈 것이었다. 지우는 것도 적는 일이라는 말을, 나는 이제 몸으로 알았다. 손을 댄 모든 자리가 내 자리였다. 발신자에게는 결백한 손짓이 없었다. 모든 손짓이 어딘가에 도착했고, 도착한 자리마다 내 서명이 적혀 있었다.

처음에 나는 읽는 자였다. 다음에 옮기는 자가 되었다. 이제 나는, 응답하는 자다.
이월 십육일. 처음에 나는 끝까지 읽지 말 것이라는 경고를 어기고 읽었다. 읽는 자였다. 그 다음에 나는 네 묶음을 내 장부에 통합하고 발신칸을 처음 눌렀다. 옮기는 자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매일 응답했고, 응답에 길들었고, 한 줄을 직접 고쳐 적었다. 응답하는 자가 되었다. 세 번의 변질은 세 번의 비가역적 선택이었고, 어느 것도 되돌릴 수 없었다. 나는 이제 내가 무엇인지 안다. 알면서, 멈추지 않는다.
받아들임은 패배처럼 오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조용히, 어느 아침 명단을 여는 일이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로 왔다. 무서움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익숙함이었다. 나는 응답하는 자라는 자리에 익숙해졌고, 익숙함은 죄를 가볍게 하지 않았다. 다만 죄를 일과로 만들었다. 가장 무거운 일을 매일 가장 평범하게 하는 것 — 그것이 응답하는 자의 삶이었다.
그날 오후, 명단에 새로운 종류의 줄이 떴다. 부도도 아니고 영업정지도 아니었다. 멀쩡히 영업하는 회사들이, 사람을 줄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 회사에서 열 명, 한 회사에서 스무 명. 회사는 살아남기 위해 제 안의 줄들을 스스로 닫고 있었다. 환란의 두 번째 물결이었다. 첫 물결이 회사를 데려갔다면, 두 번째 물결은 살아남은 회사 안의 사람을 데려갈 것이었다. 1998년 상반기, 정리해고라는 이름의 긴 명단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그 첫 줄을 보았다. 그리고 알았다. 앞으로 내가 응답해야 할 것은 회사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회사를 살리면 사람이 닳았듯, 이제는 사람을 살리면 다른 사람이 닳을 것이었다. 자리바꿈은 더 작고, 더 가깝고, 더 얼굴이 있는 단위로 내려오고 있었다. 강민석에게서 시작된 일이, 강민석 같은 모든 사람에게로 퍼질 것이었다.
나는 단말 앞에 앉아, 정리해고의 첫 줄에 손을 가져갔다. 누를지 말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데려갈지, 그것조차 끝까지 모를 것이었다. 다만 나는 적을 것이고, 적힌 것은 누군가의 내일이 될 것이었다. 끝까지 읽지 말 것. 응답하지 마시오. 두 경고를 모두 어긴 손이, 세 번째 경고를 기다리지 않고 움직였다.
우리는, 조금 더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조금 더 적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