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건너뛰기
139

다음 독자

The Next Reader

  • 3,955자
  • ~10분

일월 초엿새. 어제 다섯 시에 그 장을 읽었고 오늘 아침에 다시 읽었다.

예순세째 장이다. 한 해 동안 빈 장이었다.

칸이 그려져 있다.

자로 그은 것이 아니다. 손으로 그었고 선이 두 군데 휘었다. 칸이 다섯이고 칸마다 이름이 적혀 있다.

맨 위에 표제가 있다. 전산 자료실 기록 서식(안)이라고 되어 있다.

안이라고 되어 있다. 만들려던 서식이라는 뜻이다.

칸 이름 다섯을 옮겨 적었다.

첫째 칸이 최초 여부다.

둘째 칸이 기재 경위다.

셋째 칸이 기억이다.

넷째 칸이 선후다.

다섯째 칸이 종료 여부다. 그 칸 아래에 셋이 적혀 있다. 안 끝났음, 끝났음, 모름이다.

열 시부터 열한 시까지 다섯을 내 일지와 맞춰 보았다.

시월 초엿새에 최초 여부 칸이 없다고 적었다. 십일월 초나흘에 한 번 더 적었다.

십일월 초닷새에 까닭 칸이 없다고 적었다.

십일월 초나흘에 기억 칸이 없다고 적었다.

같은 날 선후에 두 기준이 있고 둘이 상반된다고 적었다.

다섯째 칸이 어제 것이다.

어제 두 시에 미완을 미완으로 적는 칸이 없다고 적었다.

어제 네 시 반에 그 칸이 저기 있었다.

두 시간 반이다.

열한 시 반에 필체를 대조했다.

글씨가 내 것이다.

열 자를 골라 보았다. 두 달 전에 종이 대장 여든두 줄과 다섯째 묶음을 대조할 때 쓴 방식이다. 그때는 남의 글씨 둘을 맞추었다. 오늘은 제 글씨와 제 글씨를 맞춘다.

같다고 나왔다.

이 노트에 내 글씨가 이미 있다. 여섯 달째에 끊긴 문장 뒤를 내 글씨로 이었다.

그 줄과 이 서식이 같은 글씨다. 같은 것이 근거가 안 된다. 둘 다 내가 썼거나 둘 다 내 글씨를 따라왔다.

한 시부터 두 시까지 그린 기억을 찾았다.

없다.

접속 기록이 없다. 종이는 조회로 안 찍힌다. 열두 달 일지에 서식을 그렸다는 기재가 없다. 그 일지는 내 손으로 적혔으니 근거가 안 된다. 십이월 열엿새에 같은 것을 적어 두었다.

기억과 기록이 상반될 때 볼 데가 이 방에 없다. 두 달 전에 그것을 적고 그 뒤로 바뀐 것이 없다.

두 시 반부터 세 시 반까지 이 서식이 무엇인지 적어 보았다.

칸이 다섯이고 다섯 다 비어 있다.

서식은 채우는 사람이 있어야 서식이다. 만든 사람이 채우려고 만들었으면 만들면서 채웠을 것이다. 다섯이 다 비었으니 채울 사람이 따로 있다.

그 사람이 나라면 내가 만들고 내가 채운다. 그러면 만든 것을 적을 칸이 또 없다.

아니면 이 방에 다음에 오는 사람이다.

다음에 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이 방에서 배웠다. 정월에 내가 왔고 오기 전에 이 방에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앞에도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여길 근거는 회사가 열두 달 동안 이 자리를 비워 두지 않았다는 점뿐이다.

한 해 전에 내가 받은 것은 끊긴 문장 하나다. 그것이 인계였다. 무엇을 하라는 말도 없고 무엇이 있었다는 말도 없다. 나는 여섯 달을 읽고 그 뒤를 이었다.

받은 것이 끊긴 문장이라 여섯 달이 들었다. 칸이 다섯 있으면 여섯 달이 안 든다. 무엇을 적어야 하는지가 칸에 적혀 있다.

칸을 만들면 적을 것이 정해진다. 열두 달 동안 나는 서식이 정해 놓은 것만 적었고 정해 놓지 않은 것은 칸 밖에 적었다. 칸 밖의 열은 아무 목록에도 안 걸린다.

세 시 사십 분에 상자를 열어 넷을 차례로 폈다.

넷 다 끝 장 아래에 같은 한 줄이 찍혀 있다. 한 해 동안 여러 번 보았다.

우리는 조금 더 보고 있다.

넷은 저마다 제 일을 적었다. 재고, 옮기고, 지키고 받아 적었다. 넷 중에 서식을 만든 사람이 없다. 넷 다 있는 종이에 적었고 그 종이는 회사나 관청이 만들었다.

만든 사람은 그 넷 밖에 있다. 넷을 모아 한 줄을 달아 놓은 쪽이다.

열두 달 동안 나는 채우는 사람이었다. 칸이 있으면 넣고 칸이 없으면 못 넣었다. 못 넣은 것을 칸 밖에 적었고 그것이 열이다.

오늘 이 방에 칸이 다섯 생겼다.

네 시에 일지를 펴고 뒤쪽 빈 면에 그 다섯 칸을 옮겨 그렸다.

자를 대고 그었다. 그리는 데 십이 분이 들었다.

옮겨 적으면 불어난다. 여덟 달 동안 한 번도 안 어긋났다. 오늘 옮긴 것은 수도 아니고 줄도 아니고 칸이다.

칸이 불어나면 무엇이 불어나는지 이 방에 적힌 데가 없다.

네 시 십 분에 본사에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물으면 서식 신설 절차를 보내 줄 것이다. 절차에 따르면 기안을 올리고 회신을 기다리고 승인이 나면 인쇄분을 받는다. 지난해 서식 한 건이 넉 달 걸렸다.

넉 달을 기다리는 동안 칸 밖의 열이 열둘이 되고 열넷이 된다.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기다리지 않는 것을 적을 칸이 없으므로 일지에 그냥 적었다.

네 시 이십 분에 다섯 칸에 오늘 것을 적었다.

최초 여부 칸에 적었다. 이 방에서 칸을 만든 것이 처음이다.

기재 경위 칸에 적었다. 노트 예순세째 장을 옮겨 적었다.

기억 칸에 적었다. 그린 기억 없음.

선후 칸에 적었다. 노트 쪽이 먼저고 어제 네 시 반이다. 이쪽이 오늘 네 시다. 하루 뒤다.

종료 여부 칸에 셋 중 하나를 고르라고 되어 있다.

열두 달 동안 못 적은 것을 오늘 적는다. 안 끝났음에 표시했다.

다섯 시에 노트를 덮었다.

덮기 전에 뒤를 넘겨 보았다.

빈 장이 하나다.

한 해 동안 둘이었고 어제 하나가 되었다. 하나가 채워지는 데 한 해가 들었다. 남은 하나가 언제 채워지는지 셈할 데가 없다. 둘이 한 해에 하나씩이면 내년이고, 어제가 까닭이 있어 어제였다면 그 까닭을 나는 모른다.

상자에 넣고 물건을 세었다. 여섯이다. 뒤표지 안쪽 자국이 여섯이다.

두 달 전에 여섯째 자국의 임자를 세 가지로 적었다. 어제 온 묶음이거나 내 것이거나 노트를 쓴 사람이다.

오늘 넷째가 있다. 서식을 그린 손이다.

그 손이 내 손이면 넷째와 둘째가 같고, 내 손이 아니면 넷째가 따로 있고 자국은 일곱이어야 한다.

자국은 여섯이다.

다섯 시 십 분에 일지를 덮었다.

새로 그린 다섯 칸 아래에 줄이 하나 있고 그 줄은 비어 있다. 한 줄을 적었으니 다음 줄이 있다.

노트에 빈 장이 한 장 있고 일지에 빈 줄이 한 줄 있다.

그 둘을 누가 채우는지를 적을 칸이 이 서식에 없다.

댓글

  •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처음으로 남겨보세요.

댓글을 쓰려면 로그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