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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여럿에게

To Many at O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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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초사흘. 기획부에서 사내보에 실어도 되느냐고 물어 왔다.

지난달에 등대 일지를 자기 폴더에 복사해 갔다던 그 사람이었다. 사내보 삼월 호에 짧은 꼭지가 하나 비는데, 회사 창고에서 나온 옛 기록 이야기를 반 쪽쯤 쓰면 재미있겠다고 했다. 원문 몇 줄을 인용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그러시라고 했다.

생각한 것은 절차였다. 자료실 자료를 사내에 인용하는 데 별도 승인이 필요한지. 확인해 보니 사내 공유 색인에 있는 자료는 사내 목적으로 인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출처를 적으면 된다. 그것으로 절차는 끝이었다.

절차 말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승낙하기 전에 한 가지는 물어보았다. 어느 대목을 인용할 거냐고. 그 사람은 아직 안 골랐다고 했다. 읽어 보고 좋은 줄로 고르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시라고 하고 끊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대답을 조금 이상하게 여겼어야 했다. 좋은 줄로 고르겠다는 말은 그 사람이 백열여덟 면을 다 읽겠다는 뜻이다. 나는 찍느라 다 넘겼지만 읽지는 않았다. 그 자료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사람은, 우리 회사에서 아마 그 사람이 처음일 것이다.

사내보는 삼월 열흘에 나왔다. 팔백 부를 찍어 각 부서에 돌린다고 했다. 나는 우리 층에 온 것 가운데 한 부를 가져다 보았다.

꼭지는 반 쪽이었다. 제목은 「창고에서 나온 예순 해 전의 일지」였다. 회사 이관 자료를 정리하다 옛 기록이 나왔다는 소개와 함께, 등대에서 물때를 적던 사람의 이야기가 짧게 실려 있었다. 문장은 가벼웠고 사진 대신 파일 화면을 캡처해 넣었다.

인용은 두 줄이었다.

첫 줄은 내가 아는 문장이었다. 물이 예상보다 더 든다고 적은 그 대목이다.

둘째 줄은 내가 모르는 문장이었다.

나는 그것을 두 번 읽었다. 어디서 나온 문장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등대 일지를 나는 백열여덟 면 다 찍었고, 찍으면서 눈으로 훑었다.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런 문장이 있었으면 기억에 걸렸을 것 같았다.

파일을 열어 검색해 보았다. 있었다. 백열두 면째, 아래에서 셋째 줄.

원본은 상자에 있다. 나는 상자를 꺼내 백열두 면을 폈다.

그 자리에는 다른 문장이 있었다. 물때에 관한 짧은 기록이었다. 사내보에 실린 문장은 없었다.

나는 면을 다시 세었다. 파일의 백열두 면과 종이의 백열두 면이 같은 면인지 확인해야 했다. 같은 면이었다. 위쪽 다섯 줄이 똑같았고 아래에서 넷째 줄까지도 똑같았다. 아래에서 셋째 줄만 달랐다.

기획부에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파일에서 그대로 옮겨 적었다고 했다. 고쳐 쓰거나 다듬지 않았다고 했다. 옛날 문장이라 손대면 이상해질 것 같아서 화면에 있는 대로 복사해 붙였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 사람 잘못이 아니다. 파일에 있는 것을 옮겼으면 옮긴 대로 맞다.

전화를 끊고 나는 그 문장을 종이에 적어 보았다. 적어 놓고 보니 문장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 등대 일지에 있을 법한 문장이었다. 물과 시각에 관한 문장이고 어투도 앞뒤와 같았다.

다만 종이에 없었다.

없는 문장이 있는 문장처럼 보이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 앞뒤와 같은 손으로 쓰여야 한다. 사내보에 실린 것은 활자였으므로 손을 볼 수 없었다. 파일을 열어 그 줄을 확대해 보았다.

글씨는 등대 일지의 손이었다. 앞 줄과 뒷줄과 같은 기울기, 같은 눌림. 나는 필적을 볼 줄 모르지만 다르면 다른 줄은 안다. 다르지 않았다.

지난달에 나는 획 하나를 보았다. 원본에 없고 파일에 있는 짧은 세로획. 그것은 획이었다. 이번 것은 문장이다. 획에서 문장까지 오는 데 한 달 반이 걸렸다.

이 순서를 그렇게 적어 놓고 나니 다음이 무엇일지가 저절로 떠올랐다. 그래서 적기를 그만두었다.

책상 아래에서 상자를 꺼내 백열두 면을 다시 폈다. 종이에는 여전히 그 문장이 없었다. 앞뒤 면도 넘겨 보았다.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회사 안에는 두 가지 등대 일지가 있다. 상자에 든 것과 화면에 뜨는 것. 사내보를 읽은 팔백 명은 화면 쪽을 읽었다. 어느 쪽이 진짜냐고 물으면 나는 상자 쪽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답하는 사람은 이 회사에서 나 하나다. 나머지는 물을 일이 없다.

삼월 열사흘에 조회 통계를 뽑아 보았다. 사내보가 나가고 사흘 동안 자료실 코드 조회가 평소의 열두 배였다. 평소에는 하루 네 건쯤이었는데 사십팔 건이 되었다. 조회한 부서가 열아홉 곳이었다. 평소에는 두어 곳이다.

다운로드는 이백 건이 넘었다. 이백 건이라는 것은 이백 벌이 각자 폴더에 생겼다는 뜻이다. 그중 몇 벌이 다시 복사되었는지는 잡히지 않는다.

지난달까지 이 자료를 읽은 사람은 나 하나였다. 그전에는 전임자 하나였을 것이다. 그전 예순 해 동안은 몇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아주 적었을 것이다.

반 쪽짜리 꼭지 하나에 그것이 팔백 명에게 갔다. 팔백 부는 각 부서에 몇 부씩 돌리는 수이고, 한 부를 여럿이 돌려 보는 것까지 세면 더 된다.

나는 그 셈을 종이에 적어 보았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건네면 하루에 한 벌이다. 한 사람이 게시판에 올리면 하루에 수백 벌이다. 전하는 사람 수는 똑같이 하나인데 받는 사람 수가 다르다. 값이 싸지면 사람은 더 한다고 지난달에 적었는데, 이번 것은 값이 싸진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값이 하나에 붙지 않았다. 한 번 보내면 몇에게 가든 같은 한 번이다.

삼월 열닷새에 다른 부서에서 전화가 왔다. 총무부였다. 사내보를 보고 옛 일지가 궁금해 조회해 보았는데, 등대 일지 말고 다른 것도 있느냐고 물었다.

있다고 했다. 넷이 더 있다고. 측량과 전신과 서고와, 그리고 자료실 기록이 있다고.

그 사람이 자료실 기록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잠깐 답을 못 했다. 그것은 전임자의 공책이다. 목록에 자료실 기록이라고 적은 것은 나다. 그렇게 적었으므로 그것은 회사 자료이고, 회사 자료이므로 사내 공유 색인에 있고, 색인에 있으므로 지금 총무부 직원이 조회할 수 있다.

자료실 업무 기록이라고 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그러면 회사 일이 적혀 있겠네요 하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사람이 재미있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고 나서 자료실 기록 파일의 조회 수를 확인해 보았다. 사내보가 나가기 전에는 영이었다. 오늘까지 열일곱이었다.

열일곱 사람이 전임자의 공책을 열어 보았다. 그 공책의 마지막 장에는 문장이 중간에서 끊겨 있고, 파일에는 그 뒤에 획이 하나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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