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 열닷새. 공책은 마흔두 면이었고 십이 분 걸렸다. 검색어를 넣자마자 걸렸다. 화면이 결과를 세어 보여 주는데 다섯 건이었다.
아침에 시작해서 아침에 끝났다. 옛 일지 넉 장을 사흘 걸려 찍고 나니 마흔두 면은 일도 아니었다. 한 장 얹고 덮고 누르고, 저장하고 다음 장. 표지까지 찍었다. 표지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흰 면이 하나 저장되었다.
마지막 면에서 손이 잠깐 멎었다. 문장이 중간에서 끊긴 그 면이다. 얹고 덮고 누르고 화면을 보았다.
끊긴 문장 뒤에 획이 하나 있었다.
등대 일지 때와 같은 자리, 같은 모양이었다. 짧은 세로획. 나는 원본을 보았고 원본에는 없었다. 이번에는 두 번 확인하지 않았다. 한 번 보고 저장했다. 같은 일이 두 번째면 놀라기보다 분류하게 된다. 나는 그것을 장비 문제로 분류해 두었고, 다음 주에 전산실이 내려오면 두 건을 함께 보여 주기로 했다.
공책은 찍는 동안 자꾸 읽혔다. 옛 일지는 글씨가 낯설어 눈이 미끄러지는데 이것은 요즘 글씨라 그냥 읽힌다. 유월과 칠월은 업무 이야기뿐이었다. 팔월에 사람 이름이 몇 나오고, 구월에 상자와 필름 이야기가 늘고, 시월부터는 화면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한 사람이 반년 사이에 무엇을 자주 생각하게 되었는지가 면수로 드러났다.
찍는 손은 읽는 손보다 빠르다. 나는 읽으려던 것이 아니었고 실제로 읽지도 않았다. 다만 면을 넘길 때마다 한두 줄이 눈에 들어왔고, 마흔두 면이면 한두 줄이 마흔두 번이다.
다섯 묶음이 전부 파일이 되었다. 상자는 비었다.
빈 상자를 어떻게 할지 잠깐 생각했다. 목록에 없는 물건이니 폐기 절차로 넘기면 되는데, 나무 상자는 폐기 신청 서식에 해당 항목이 없었다. 기타로 넣으면 되겠지만 그러자니 다시 인사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상자를 책상 아래 원래 자리에 도로 밀어 넣었다. 종이는 다 나왔으니 이제 그냥 빈 나무 상자다.
오후에는 검색을 시험했다. 새로 등록한 파일이 제대로 잡히는지 보는 일이다. 자료실 코드로 검색하니 오늘 아침 것까지 다 나왔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였다.
시험 삼아 사내 공유 색인에서도 검색해 보았다. 우리 부서 것이 다른 부서 검색에도 걸리는지는 확인해 본 적이 없었다.
걸렸다.
등대 일지, 측량 일지, 전신 일지, 서고 일지. 그리고 자료실 기록. 다섯 묶음이 다 사내 공유 색인에 올라와 있었다. 어제 등록한 것까지였고 오늘 아침 것은 아직 없었다.
나는 그것을 올린 적이 없었다. 공유 폴더로 복사한 적도 없고 누구에게 보낸 적도 없다. 나는 스캔해서 저장했을 뿐이다.
전산실에 전화를 걸어 물었다. 담당자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야간 자동 색인이라고 했다. 각 부서에서 그날 새로 등록한 파일은 밤에 색인 작업이 돌아 다음 날 아침에 사내 전체 검색에 반영된다고 했다. 부서별로 따로 올릴 필요가 없어 편하다고 했다.
편하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니까 내가 저장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저장은 등록이고 등록은 색인이고 색인은 검색이다. 밤사이에 그렇게 된다. 내가 손을 뗀 뒤에 벌어지는 일이고, 벌어지라고 만들어 놓은 기능이다.
나는 그 순서를 종이에 적어 보았다. 얹는다, 누른다, 저장한다, 등록된다, 색인된다, 검색된다, 청구된다, 복사된다. 여덟 단계 가운데 내 손이 닿는 것은 앞의 세 개다. 나머지 다섯은 저절로 간다. 저절로라는 말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사람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두었으니 저절로는 아니고, 그렇다고 매번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다.
여덟 단계를 적어 놓고 보니 지점에서 쓰던 결재 흐름표와 비슷했다. 다만 결재는 사람이 도장을 찍어야 다음 칸으로 가고, 이것은 밤이 되면 간다. 도장 없이 가는 흐름표를 나는 처음 보았다.
네 시에 전화가 왔다. 기획부 직원이었다.
목소리가 밝았다. 검색하다가 이상한 걸 봤다고 했다. 등대 일지라는 게 있던데 이게 뭐냐고. 나는 이관 자료 중에 섞여 있던 옛 자료라고 답했다. 그 사람이 웃으면서, 회사에 이런 게 왜 있느냐고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고 했다. 실제로 몰랐다. 이관 상자에는 회사와 상관없는 것이 가끔 섞여 나온다고 덧붙였다. 그 사람은 그런가 보다 했다.
그 사람은 조금 읽어 봤는데 재미있다고 했다. 물때 적어 놓은 게 꼬박꼬박 있는데 뒤로 가면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고. 옛날 사람이 혼자 등대에서 뭐 하고 지냈는지가 보인다고 했다. 나는 그렇습니까 하고 답했다.
그 사람이 말했다. 심심할 때 보려고 제 폴더에 복사해 뒀어요.
나는 그러시라고 했다. 딱히 하지 말라고 할 근거가 없었다. 사내 공유 색인에 올라간 자료를 사내 직원이 복사하는 것은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
전화를 끊고 나서 파일 수를 세어 보았다. 자료실 이름으로 등록된 것이 이천오백 개대였다. 기획부 폴더에 복사된 것은 여기 안 잡힌다. 다른 부서 폴더의 파일은 그 부서 것으로 세어진다. 그러니까 지금 회사 안에 등대 일지가 몇 벌인지를 세려면 부서마다 물어보아야 한다.
물어볼 일은 아니다. 자료 한 벌이 어느 폴더에 몇 개 있는지를 세는 부서는 없다. 세라고 하면 셀 수야 있겠지만, 세는 동안에도 늘 것이다.
다섯 시 반에 마지막으로 목록을 정리하고 화면을 그대로 두고 나왔다. 책상 아래에 빈 상자가 있고 책상 위에 다섯 묶음이 있었다. 종이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종이는 사흘 전과 같은 자리에 그대로 있다.
문을 잠그기 전에 책상 위의 공책을 상자에 도로 넣었다. 넣고 나서 상자 옆면의 받는 이 칸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기록 담당. 처음 보았을 때는 그 자리가 나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그 칸에 적힌 것이 자리 이름이지 사람 이름이 아니라는 점이 다시 걸렸다. 자리 이름으로 적어 두면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이 누구든 받는 이가 된다.
계단을 올라오면서 나는 오늘 한 일을 다시 세어 보았다. 십이 분 스캔했고 검색을 시험했고 전화를 두 통 받았다. 그것이 전부다.
그 사이에 다섯 묶음은 이 방을 나가 본 적이 없는 채로 회사 안 어딘가에 몇 벌인지 모르게 있게 되었다.
지점에 있을 때 나는 하루가 끝나면 시재를 맞췄다. 들어온 돈과 나간 돈이 맞아야 퇴근한다. 여기 와서 열이틀 동안 맞춰 본 것이 한 번도 없다. 맞출 것이 없어서다. 나간 것이 얼마인지를 셀 방법이 없으면 들어온 것과 견줄 수도 없다.
퇴근길에 그 생각을 조금 했다. 그러다 지하철에서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