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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 열나흘. 다섯 묶음 가운데 넷이 파일이 되었다.

측량 일지 이백열두 면, 전신 일지 백사십육 면, 서고 일지 구십칠 면. 등대 일지까지 합쳐 오백일흔세 면이었다. 사흘 걸렸다. 남은 것은 공책 하나였고 그것은 내일 하기로 했다.

사흘 동안 나는 이 일에 익숙해졌다. 얹는 손과 누르는 손이 따로 움직이고, 그동안 눈은 화면을 본다. 화면에 뜬 면이 괜찮은지 아닌지는 반쯤 자동으로 판단된다. 기울었으면 다시, 그림자가 졌으면 다시. 사흘째가 되니 하루에 이백 면이 그렇게 어려운 수가 아니었다.

전신 일지는 다른 것보다 읽기 어려웠다. 글씨가 작고 줄이 빽빽했다. 밤에 받아 적은 전문이 시각과 함께 적혀 있었는데, 시각이 대개 새벽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밤 근무를 했다고 생각했다. 등대 지키는 사람도 밤 근무를 하니 그런 자리가 그때는 많았을 것이다.

오후에 감사실에서 전화가 왔다. 지난주에 넘긴 이관 목록 파일 가운데 일부가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확인해 보니 파일이 깨진 것이 아니라 감사실 쪽 프로그램 판이 낮아서였다. 전산실에 물어 변환해 주기로 했다.

변환은 원본 파일을 열어 다른 형식으로 다시 저장하는 일이다. 저장하면 파일이 하나 더 생긴다. 원본은 그대로 두고 변환본을 보내야 하므로, 목록에 같은 자료가 두 줄이 된다. 나는 스물두 상자분을 다 변환했다. 오후 내내 걸렸고 다 끝나고 나니 파일 수가 두 배가 되어 있었다.

변환을 걸어 두고 기다리는 동안 어제 적어 둔 특이사항을 다시 보았다. 등대 일지 마지막 면의 획.

변환본을 열어 그 면을 찾았다. 있었다.

나는 그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스캔할 때 유리판에 잡티가 있었다면 그 잡티는 파일 안에 그림처럼 들어간다. 파일을 다른 형식으로 바꾸면 그림도 같이 옮겨 가니 그대로 있는 것이 맞다. 그러니까 이상할 것이 없다.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두 번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그 생각을 접었다.

원본 종이를 다시 꺼내 그 면을 보았다. 여백이었다.

사본에는 있고 원본에는 없는 것이 사본의 사본에도 있다.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나는 몰랐다. 오류라고 부르면 고쳐야 하고, 특징이라고 부르면 두어야 한다. 일지에는 특이사항이라고만 적었다.

변환이 도는 동안 할 일이 없어 목록을 정렬해 보았다. 등록 순으로 놓으니 열흘 사이에 들어온 것이 화면 두 쪽을 채웠다. 이름 순으로 놓으니 같은 자료가 나란히 붙어 앞뒤로 늘어섰다. 원본과 변환본이 이름이 거의 같고 끝의 표시만 달랐다. 나란히 보면 어느 쪽이 먼저 만들어진 것인지 이름만으로는 알기 어려웠다.

다섯 시에 파일 수를 세어 보았다. 자료실 이름으로 등록된 파일이 이천삼백 개가 조금 넘었다. 열흘 전에 내가 왔을 때는 사백 개대였다. 그 사이에 늘어난 것은 대부분 스캔한 것과 변환한 것이다.

늘어나는 방식이 종이와 다르다는 것을 그때 처음 생각했다.

종이로 사본을 만들려면 한 장씩 다시 찍어야 한다. 오백 면짜리 묶음의 사본을 만들려면 오백 번을 찍어야 하고 그것은 사흘 일이다. 파일은 저장 한 번이면 된다. 오백 면이 한 번이다. 사흘이 삼 초가 된다.

값이 싸지면 사람은 더 한다. 지점에서도 그랬다. 복사기가 층마다 들어온 해에 결재 서류가 두 배가 되었다. 사본을 만드는 값이 싸졌기 때문이지 서류가 더 필요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파일이 이천삼백 개가 된 것도 자료가 늘어서가 아니다. 같은 자료가 여러 벌이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하는 생각이다. 그다음이 조금 걸렸다.

같은 자료가 여러 벌이 되면 그 자료는 여러 군데에 있게 된다. 감사실 화면에도 있고 내 화면에도 있고 보관고 서버에도 있다. 한 벌이 지워져도 다른 벌이 남는다. 종이는 태우면 없어지는데 파일은 태울 데가 여러 곳이 된다.

나는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배웠다. 자료 보전이라는 말이 그런 뜻이다.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

다만 등대 일지 마지막 면의 그 획도 이제 여러 군데에 있었다. 원본에 없는 것이 이천삼백 개 가운데 몇 벌에 들어 있다. 보전이란 원본을 지키는 일인데, 지금 여러 군데에 남은 것은 원본이 아니라 사본이었다.

그 생각을 오래 하지는 않았다. 나는 자료를 지키라고 여기 앉아 있는 것이지 무엇이 원본인지를 따지라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따지자면 감사실이 오늘 받아 간 것도 사본이고 그 사본으로 감사를 한다. 회사가 그렇게 돌아간다.

여섯 시 조금 전에 전산실에 전화를 걸었다. 스캔본과 변환본에 원본에 없는 획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담당자가 잠깐 생각하더니 물었다. 원본을 다시 찍어 봤느냐고. 찍어 봤다고 했다. 그러면 종이 뒷면이 비쳐 보인 것 아니냐고 했다.

뒷면은 백지라고 답했다. 그는 그러면 잉크가 배어 나온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오래된 종이는 그런다고 했다. 나는 앞면에도 그 자리에는 잉크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잠깐 말이 없다가, 그러면 자기가 다음 주에 내려가 보겠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뒷면을 다시 확인했다. 백지였다. 빛에 비춰 보아도 아무것도 없었다.

일지에 오늘 처리한 것을 적었다. 스캔 완료 면수, 변환 건수, 파일 총수. 숫자만 적어 놓으니 하루가 깔끔해 보였다. 지점에서 십 년을 그렇게 적었다. 시재가 맞으면 하루가 끝난 것이고 안 맞으면 맞을 때까지 남는 것이다. 여기는 맞고 안 맞고를 볼 수가 없다. 파일 수는 늘기만 하고 줄지 않으니 대조할 상대가 없다.

퇴근 전에 내일 할 일을 적었다. 공책 스캔. 마흔 면쯤 될 것이다. 마흔 면이면 십 분이다. 사흘 걸린 일 뒤에 십 분짜리가 남았다.

책상 위의 공책을 한 번 보고 나왔다. 표지에 이름이 없고 모서리가 조금 눌린 대학 노트였다. 내일이면 저것도 파일이 된다. 파일이 되면 조회가 되고, 조회가 되면 청구가 들어올 수 있다.

누가 이런 것을 청구하겠느냐고 생각하면서 나는 문을 잠갔다.

계단에서 문득, 오늘 만든 변환본이 어디까지 갔는지를 세어 보았다. 내 화면에 한 벌, 보관고 서버에 한 벌, 감사실에 보낸 것이 한 벌. 감사실은 그것을 열어 보고 자기 폴더에 저장했을 것이다. 그러면 네 벌이다. 감사가 끝나면 보고서에 붙을 것이고 그러면 다섯 벌이다.

내가 만든 것은 한 벌인데 세어 보면 다섯이다. 어디까지가 내가 한 일인지를 정하기가 애매했다. 첫 벌은 내가 만들었고 나머지는 저절로 늘었다고 말하면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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