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 여드레. 상자는 나흘째 책상 아래에 있었다.
그 나흘 동안 청구가 열한 건 들어왔고 열한 건 다 처리했다. 감사실 것은 스물두 상자분이 순차로 오는 중이었는데 하루에 두세 상자씩 파일이 도착했다. 도착한 것을 열어 이상이 없는지 보고 등록하고 감사실로 넘기면 끝이었다. 나흘 만에 나는 이 일이 어떤 일인지 대강 알게 되었다. 종이를 만지지 않는 자료 관리다.
상자는 그동안 무릎에 닿았다. 자리를 옮겨 보려다가 무거워서 그냥 두었다. 나흘째가 되니 그것이 거기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일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인사부에 전화를 걸었다. 전임자 물품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고, 반송 절차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담당자가 잠깐 알아보더니 면직자 개인 물품은 본인에게 연락해 찾아가게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연락처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니 개인 정보라 알려 줄 수 없고, 대신 인사부에서 연락해 보겠다고 했다.
오후에 회신이 왔다. 등록된 번호가 결번이라고 했다. 다른 연락처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담당자가 조금 곤란해하다가 물품이 회사 자료로 보이면 자료실 소관으로 처리하라고 했다. 개인 물품이면 일정 기간 보관 후 폐기 절차라고 했다.
회사 자료인지 개인 물품인지를 판단하려면 열어 보아야 했다.
뚜껑은 잘 열렸다. 못이나 잠금 같은 것은 없었고 그냥 얹혀 있었다.
안에는 종이 묶음이 다섯이었다.
아래 네 묶음은 오래된 것이었다. 종이가 누렇고 가장자리가 삭아 있었다. 표지에 제목 같은 것은 없고 대신 한 줄이 찍혀 있었다. 네 묶음 다 같은 문장이었다. 나는 그것을 두 번 읽었는데 무슨 뜻인지 잘 들어오지 않았다. 옛날 문투였다.
표지의 한 줄은 이랬다. 우리는 조금 더 보고 있다. 인쇄가 아니라 도장이었고 네 묶음에 같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무슨 기관의 표어 같기도 하고 출판사 이름 같기도 했다. 옛 자료에는 이런 문구가 흔하다고 들었다.
첫 묶음을 조심스레 넘겨 보았다. 손으로 쓴 일지였다. 등대 이야기 같았다. 물이 드는 시각과 나는 시각을 날마다 적어 두었고 사이사이에 사람 이야기가 있었다. 둘째 묶음은 갱 이야기였다. 깊이를 재는 숫자가 잔뜩이었다. 셋째는 전신 관련이었고 넷째는 서고 관련이었다. 넷 다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맨 위에 놓인 것만 근래 것이었다. 흔한 대학 노트였고 표지에 이름은 없었다. 펼치니 작년 유월부터 날짜가 있었다. 필적은 한 사람이었다.
전임자의 일지였다.
나는 그것을 읽어야 하나 잠깐 망설였다. 남의 일지다. 그러나 회사 자료인지 개인 물품인지 판단하라는 것이 오늘 받은 지시였고, 판단하려면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보아야 했다. 나는 처음 몇 장을 넘겼다.
업무 일지였다. 그날그날 처리한 이관 건과 상자 수와 반출 항 번호가 적혀 있었다. 지금 내가 쓰는 것과 비슷했다. 다만 중간중간에 업무와 상관없어 보이는 문장이 섞여 있었다. 화면이 어떻더라, 칸이 어떻더라 하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것을 그 사람의 개인적인 메모로 읽었다. 지하에서 혼자 오래 일하면 그런 것을 적게 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한 대목이 눈에 걸렸다. 십일월 어느 날에 사람 이름이 하나 적혀 있고 그 옆에 자리 코드가 적혀 있었다. 그 다음 줄에 그 사람이 그날 어떻게 되었는지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몰랐다. 다만 인사 기록에서 본 것과 같은 형식의 코드였고, 그런 코드가 개인 일지에 적혀 있는 것이 규정에 맞는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뒤로 갈수록 업무 기록이 줄고 그 이야기가 늘었다. 십일월과 십이월은 거의 그 이야기뿐이었다. 나는 몇 장을 건너뛰어 마지막 장을 폈다.
십이월 열엿새였다. 면직일이었다.
한 문단이 적혀 있었고 문장이 중간에서 끊겨 있었다. 마침표도 없고 다음 줄도 없었다. 펜이 종이에서 떨어진 자리에 잉크가 조금 뭉쳐 있었다.
읽는 자에서 옮기는 자로, 옮기는 자에서
거기까지였다. 그 아래로 종이가 두 장 더 남아 있었는데 둘 다 비어 있었다.
나는 그 줄을 몇 번 읽었다. 다음에 무슨 말이 올지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옮기는 자에서 무엇으로. 문장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 뒤에 한 단계가 더 있어야 한다.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있어야 한다는 것만은 알겠다는 느낌이 이상했다.
노트를 덮고 아래 네 묶음을 다시 보았다. 넷 다 마지막 장을 펴 보았다. 넷 다 문장 중간에서 끊겨 있었다.
나는 잠깐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오래된 일지 넷과 근래 일지 하나가 다 같은 자리에서 끊겨 있다는 것이 우연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 일지가 온전하게 남는 경우가 더 드물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종이는 상하고 사람은 갑자기 그만두고 마지막 장은 대개 어수선하다.
상자 뚜껑을 도로 덮으려다 안쪽을 보았다. 인장 자국이 다섯 개 찍혀 있었다. 같은 인장을 다섯 번 찍은 것이었다. 그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상자 옆면에도 칸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받는 이라고 인쇄된 칸이었다. 거기에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다음 기록 담당.
이름이 아니라 자리였다. 나는 그 칸을 한참 보았다. 지금 이 방에서 그 자리에 해당하는 사람은 나였다.
전산실에 전화를 걸어 물었다. 등록 번호가 없는 옛 자료가 나왔는데 이것도 스캔 대상이냐고. 담당자가 잠깐 생각하더니, 자료실에 있는 것은 원칙적으로 다 대상이라고 했다. 등록 번호는 스캔하면서 새로 매기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 이 다섯 묶음도 파일이 된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상자를 책상 위로 올려 두었다. 다음 주 스캔 일정에 넣으려면 목록부터 만들어야 했다.
목록을 만들려면 다섯 묶음이 각각 무엇인지 한 줄로 적어야 한다. 등대 일지, 측량 일지, 전신 일지, 서고 일지.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무엇이라고 적어야 하는지 잠깐 막혔다. 전임자 업무 일지라고 적으면 개인 물품이 되고, 자료실 기록이라고 적으면 회사 자료가 된다. 같은 공책이 무엇이 되는지가 내가 적는 한 줄에 달려 있었다.
나는 자료실 기록이라고 적었다. 그렇게 적어야 스캔 대상이 되고, 스캔 대상이 되어야 폐기 절차로 넘어가지 않는다. 태우는 것보다 찍어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