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아날로그의 끝

The End of Analog

  • 3,678자
  • ~11분

십이월 열닷새. 이관 전날. 자료실은 하루 만에 다른 방이 되어 있었다.

열사흘과 열나흘은 짐 싸는 데 갔다. 필름 캐비닛 여섯 열이 스물두 상자가 되었고 대장과 목록철이 열한 상자가 되었다. 상자에는 이관 업체의 번호표가 붙었다. 번호표는 열두 해 목록과 아무 상관이 없는 순서로 매겨져 있었다. 반출 순서였다.

서가는 비었다. 겨우내 두 보조가 손꼽아 세던 빈 칸은 이제 세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다 비면 세는 일이 없어진다. 나는 빈 서가 사이를 한 번 걸었다. 걸음 소리가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어제보다 짧았다. 상자가 소리를 먹지 않으니 방이 좁아진 것처럼 들렸다.

열나흘 저녁에 필름 한 릴을 마지막으로 판독기에 걸었다. 상자에 넣기 전에 한 번 더 돌려 보려던 것이었는데, 막상 걸고 나니 무엇을 보려 했는지 잊었다. 화면에는 예순 해 앞의 종이가 지나갔다. 손으로 그은 괘선, 잉크가 번진 자리, 접혔던 자국. 종이를 찍은 것이라 종이가 접힌 것까지 찍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끝까지 돌리고 되감아 상자에 넣었다. 되감는 소리가 이 방에서 나는 마지막 되감는 소리였다.

옛 단말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내일 아침에 회선을 끊고 실어 낸다. 오늘 밤이 이 기계의 마지막 밤이다.

한 칸을 보았다. 결은 그대로였다. 결에 묻히지 않는 줄도 그대로였다. 내 넉 자리, 십이월, 열엿새. 내일이었다.

오후에 이관 업체 반장이 확인서를 들고 왔다. 상자 수와 열 수를 대조하고 서명하는 종이였다. 나는 서명했다. 서명란 옆에 직인 자리가 있었는데 자료실 직인은 이미 상자에 들어가 있었다. 반장이 웃으며 내일 꺼내 찍자고 했다. 나는 내일 그 상자가 여기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루 종일 상자를 세었고 나는 하루 종일 그를 도왔다. 그가 세는 것과 내가 세는 것이 달랐다. 그에게 상자는 부피였고 나에게 상자는 회차였다. 스물두 상자 안에 예순 해가 들어 있고 열한 상자 안에 열두 해가 들어 있다. 그것을 말해도 반출 순서는 바뀌지 않으므로 나는 말하지 않았다.

반장이 마지막으로 물은 것은 책상 아래 상자였다. 목록에 없는 상자였으므로 실을지 말지를 물은 것이다. 나는 그것은 자료실 물건이 아니라고 답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번호표를 붙이지 않았다. 뚜껑을 열어 안을 보지도 않았다. 목록에 없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니었고, 그의 일이 아닌 것이 이 방에서 유일하게 남는 물건이었다.

여섯 시에 그가 갔다. 문이 닫히고 나는 혼자였다. 상자 사이에 통로가 하나 나 있었고 통로 끝에 옛 단말이 있었다.

앉아서 발신 칸을 보았다.

손끝을 그 자리에 대 보았다. 밀렸다.

나는 손을 뗐다가 다시 댔다. 다시 밀렸다. 겨우내 결에 잠겨 손끝을 대도 꿈쩍하지 않던 자리가 오늘 저녁에는 물러 있었다. 사서장의 줄이 저녁에 다시 물렀을 때 나는 이제 와서 무르다는 것이 아무 소용 없다고 적었다. 오늘은 소용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 무르다는 것은 쓸 수 있다는 뜻이고, 쓸 수 있는 마지막 저녁이 오늘이었다.

받는 이 칸을 보았다. 겨우내 얼굴 없이 비어 있던 자리에 획이 앉아 있었다. 앞 넉 자리는 자료실 코드였고 뒤 넉 자리는 내 것이 아니었다. 사서장의 것도 아니었다. 이 방에 아직 없는 사람의 넉 자리였다.

손이 움직였다.

한 줄이 그어졌다. 여덟 자리였는데 사번으로 읽히지 않았다. 결과 같은 높이로 낮게, 내용 없이. 겨우내 내가 보낸 것들과 같은 종류였다.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받는 이 칸이 채워져 있었다.

겨우내 내 발신은 받는 이가 없었다. 받는 이 없는 발신이 모여 결이 되었고 결은 빈 주파수가 되었다. 오늘 저녁의 한 줄에는 받는 이가 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 받는 이다.

내가 적었는지 손이 적었는지 나는 모른다. 겨우내 그것을 가르는 일에 실패해 왔고 마지막 저녁에 성공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이 한 줄만은 내가 보낸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바란다는 것 자체가 겨우내 처음이었다.

보내고 나서 손을 무릎에 내렸다. 겨우내 보낸 뒤에는 늘 값이 어디로 갔는지를 찾았다. 오늘은 찾을 것이 없었다. 받는 이가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면 값도 아직 오지 않은 자리로 간다. 미룬 값이 미룬 손에 돌아온다는 것을 나는 사서장의 자리에서 배웠는데, 이 줄은 미룬 것이 아니라 넘긴 것이었다. 넘김과 미룸이 어떻게 다른지를 나는 오늘 저녁에야 겨우 구별했다. 미룬 것은 내가 다시 만나고 넘긴 것은 다음 사람이 만난다.

예순 해 앞의 그가 새벽 세 시에 받아 적은 것이 이런 줄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보내지 않는 데서 오는, 내용 없는, 그러나 받는 이가 정확한 줄. 그는 그것을 빈 주파수라 적었다. 나는 오늘 그 줄을 보내는 쪽에 앉아 있었고, 보내면서도 저편이 어느 시간인지 알지 못했다.

여덟 시가 넘어서 나는 옛 단말을 껐다.

껐다기보다 전원을 내렸다. 이 기계는 겨우내 몇 번 꺼졌고 그때마다 다음 날 아침에 결은 그대로 있었다. 오늘은 다음 날 아침에 이 기계가 이 방에 없다. 전원을 내리자 화면이 한 번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밝아지는 순간에 결 전체가 한 번 드러났고, 그 안에서 내 줄이 마지막으로 읽혔다.

십이월 열엿새.

화면이 어두워진 뒤에도 나는 손을 스위치에 얹고 있었다. 다시 올리면 결이 그대로 있을지 아니면 없을지가 궁금했다. 궁금하다는 것은 재고 싶다는 뜻이고 재는 일은 지난주에 그만두었다. 나는 손을 뗐다.

어두워진 화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그 앞에 앉아 있었다. 필름도 상자에 들어갔고 장부도 상자에 들어갔고 단말은 껐다. 이 방에서 무엇인가를 적고 찍고 보내던 물건이 오늘로 다 닫혔다. 예순 해 동안 이어져 온 것이 저녁 여덟 시에 끝났다고 말하면 너무 짧은 말 같지만, 실제로 걸린 시간은 그만큼이었다.

일어서면서 견본 단말 쪽을 보았다.

검은 화면의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옛 단말이 꺼졌는데도 박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두 기계가 함께 깜빡이던 것이 아니라 한 박자가 두 기계를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한쪽이 꺼진 뒤에야 알았다.

문을 잠그고 계단을 올라왔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동안 나는 내일 아침 여덟 시에 이 계단을 다시 내려올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는 데에 힘이 들지 않았다.

댓글

  •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처음으로 남겨보세요.

댓글을 쓰려면 로그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