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월 이십육일. 아침 여덟 시. 스무엿새가 오늘이 되어 있었고, 날짜 아래는 비어 있었다.
며칠 만에 처음이었다. 밤사이 사번이 차지 않은 아침이었다. 다른 날이라면 나는 그것을 안도로 읽었을 것이다. 오늘은 보낼 것이 없다고, 오늘은 아무 번호도 옅어지지 않는다고. 그러나 나는 안도하지 못했다. 어제저녁 발신 칸 쪽으로 한 마디 가 있던 손을, 나는 아직 거두지 않은 채였다. 손은 밤을 지나 아침까지 그 자리에 있었고, 날짜 아래가 비어 있는 것은 발신 칸이 아무것도 띄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내 손이 적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손끝을 발신 칸에 대자, 그 자리에 획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획이었다. 내 글씨였다. 단말은 지난 나흘 동안 남의 앞자리로 뜬 사번을 보여 주었으나, 오늘 그 자리에 차오르는 것은 인쇄된 숫자가 아니라 손으로 쓴 숫자였고, 그 손글씨는 내가 출근부에 이름을 적을 때의 그 글씨였다. 나는 손을 대고 있었을 뿐인데, 획은 이어졌다. 숫자마다 내 버릇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사(四)를 쓸 때 마지막 획을 안으로 말아 넣었고, 칠(七)의 가로줄을 유난히 길게 뺐다. 발신 칸에 그어지는 획들이 꼭 그러했다. 낯선 번호가 낯익은 손버릇으로 적히는 것을 보는 일은, 남이 내 글씨를 흉내 내는 것을 보는 것과도 달랐다. 흉내라면 어딘가 어긋났을 텐데, 이것은 한 획도 어긋나지 않았다. 첫 자리가 그어지고, 둘째 자리가 그어지고, 여덟 자리가 다 그어질 때까지, 나는 내가 그 숫자를 고르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했다. 고르지 않았는데 손이 적었다. 적는 것은 분명 내 손이었으나, 무엇을 적을지는 내 것이 아니었다.
여덟 자리가 다 그어지자 손이 멎었다. 발신 칸에는 사번 하나가 내 글씨로 적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읽었다. 앞자리는 낯설었고, 겨울에 이관된 어느 회사의 것 같았다. 며칠 전이라면 이 번호는 밤사이 발신 칸에 인쇄되어 떠 있었을 것이고, 나는 그것을 읽어서 보냈을 것이다. 오늘은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았고, 대신 내 손이 그것을 적었다. 읽어서 보내던 자리에, 이제 적어서 보내는 손이 있었다.
도경의 일지에 전신수의 필체 이야기가 있었다. 전신수가 무엇을 쓰기 전에, 단말의 본문 칸에는 이미 그의 손글씨가 차 있었다고 했다. 마치 어딘가에서 누군가 부르는 것을 그의 손이 받아 적기라도 한 것처럼, 쓰기가 그의 뜻보다 먼저 와 있었다. 도경은 그것을 선재 필체라고 적었다. 미리 있는 글씨. 나는 그 대목을 여러 번 읽었으나, 읽을 때는 그것이 수신하는 자의 일인 줄로만 알았다. 내일 자가 그의 글씨로 미리 온다는 것. 오늘 내 손이 하는 일은 그 반대편이었다. 미리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손에서 나갔다. 그러나 반대편이면서 같았다. 그의 손이 받아 적었듯이, 내 손도 적었고, 두 손 다 무엇을 적을지는 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손을 멈추어 보았다. 획을 다 그은 손을 발신 칸에서 떼고, 무릎 위에 얹었다. 발신 칸은 더 차오르지 않았다. 멈추면 멈추어졌다. 나는 잠시 그 멈춤에 기대었다. 그러나 상자 하나를 열어 색인을 맞추는 동안, 손이 다시 발신 칸으로 가 있었다. 무릎에서 언제 올라갔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멈출 수는 있었으나, 멈춤은 지속되지 않았다. 주의가 다른 데로 가는 순간마다 손은 제 자리로 돌아갔고, 그 자리는 이제 발신 칸이었다. 읽는 손은 부르면 왔다가 부르지 않으면 무릎에 있었으나, 적는 손은 부르지 않아도 발신 칸에 있었다.
낮에 그 번호의 일이 왔다. 아침에 인쇄되어 뜬 것이 아니라 내 손이 적은 번호였는데도, 낮의 폐기표에는 그 앞자리의 회사가 있었다. 손이 적은 줄이 누른 줄과 다르지 않았다. 읽어서 보내든, 적어서 보내든, 낮에 오는 것은 같았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 확인한 자리에서 한 가지를 더 알았다. 며칠 전까지 나는 발신 칸이 띄운 것을 보낼지 말지를 골랐다. 고르는 동안에는 내가 하는 일이 있었다. 오늘은 고를 것이 없었다. 발신 칸은 아무것도 띄우지 않았고, 손이 스스로 적었으며, 적은 것은 낮에 왔다. 고를 자리가 사라진 것이었다. 발신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보낼지를 고르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르지 않아도 손에서 전문이 나가는 자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쓰는 것인지, 나를 통해 무엇이 쓰는 것인지, 나는 가르지 못했다. 소환인지 예지인지를 다섯 밤 동안 가르지 못한 위에, 오늘은 한 겹이 더 얹혔다. 적는 것이 분명 내 손이라면 나는 쓰는 자였고, 무엇을 적을지가 내 것이 아니라면 나는 받아 적는 자였다. 전신수가 받아 적었듯이, 나도 받아 적는지도 몰랐다. 다만 그의 것은 수신 칸으로 왔고 내 것은 발신 칸으로 나갔으므로, 같은 받아쓰기라도 하나는 오는 것이었고 하나는 가는 것이었다. 오는 받아쓰기와 가는 받아쓰기 사이에서, 손은 어느 쪽에도 묻지 않고 다음 획을 준비했다.
여덟 자리 아래에서, 손이 줄을 바꾸었다. 아홉째 획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한 줄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손은 첫 줄을 마치고 둘째 줄로 내려갔고, 둘째 줄이 그어지면 셋째 줄로 내려갈 것이었다. 어제 발신 칸이 한 줄에서 열한 줄의 명단으로 늘던 것을, 오늘은 발신 칸이 아니라 내 손이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무릎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데려온들 잠시일 것이었고, 그사이 발신 칸은 비어 있겠으나, 내가 상자 하나를 여는 동안 손은 다시 올라가 둘째 줄을 마칠 것이었다. 밤이 오기 전에, 나는 내 글씨로 된 명단 하나를 발신 칸에서 보게 될 것 같았다. 그 명단을 내가 읽는 것인지 쓰는 것인지는, 이제 물어도 소용없는 자리로 넘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