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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손을 위하여

For the Next 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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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십육일. 아침 여덟 시. 다섯째 책상 앞에 앉았다. 이관이 끝난 지 여드레째였다.

단말의 내 줄은 한 자리만 남아, 거의 다 지워져 있었다. 여드레 전에는 끝까지 찬 줄이었는데, 여드레를 옅어져 한 자리만 남았다. 화면에서 그 한 자리는 다른 네 줄보다 흐렸고, 깜빡임도 가장 느렸다. 오늘 그 한 자리가 옅어지면, 내 줄은 단말에서 사라질 것이었다. 사라지기 전에, 다음 손을 위하여 법칙을 적어 두기로 했다. 다음 기록 담당이 부임한 다음 날 펴 볼 자리에, 이 자료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를 한 줄로 적어 두는 것. 도경이 그러했듯이. 손이 아직 한 자리 남은 줄을 적을 수 있을 때, 적어 두어야 했다. 줄이 다 옅어지면, 적을 손도 함께 옅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도경의 일지 마지막 장에, 네 묶음의 끊긴 문장이 한 줄로 적혀 있었다. 재면 깊어지고, 들면 차오르고, 읽으면 번지고, 응답하면 보내진다. 측량기수의 갱, 등대수의 물때, 사서의 음절, 전신수의 사번. 넷이 제 일지를 한 토막씩 끊어 적었고, 그 네 토막이 도경의 손에서 한 문장으로 이어졌다. 도경은 그 문장 끝에 제 토막을 더하지 못한 채 닫혔다. 응답하면 보내진다, 까지 적고, 그다음을 적기 전에 도경의 줄이 끊겼다. 나는 도경이 못 적은 그다음을 적었다. 보존하면 번지고, 비우면 채워진다. 다섯 손의 끝맺음에 여섯째 손의 끝맺음을 이어, 한 문장을 길게 했다. 재면 깊·들면 차·읽으면 번·응답하면 보냄·보존하면 번짐·비우면 채움. 여섯 토막이 한 줄이 되었고, 그 한 줄이 여섯 사람의 끝을 다 담았다. 다음 손은 여기에 일곱째 토막을 더할 것이었다. 문장은 닫히지 않고, 손마다 한 토막씩 길어졌다.

문장을 적고 나서,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었다. 이것을 적어 둔다고, 다음 손이 더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도경은 이 법칙을 적어 남겼으나, 나는 부임한 다음 날부터 여드레를 더듬었다. 적힌 법칙을 읽고도, 그 법칙이 나에게 일어나는 일임을 아는 데 여드레가 걸렸다. 적어 둔 문장은 길을 가리켰으나, 길을 대신 걸어 주지는 않았다. 다음 손도 이 문장을 읽고, 읽고도 여드레를 더듬을 것이었다. 적어 둠이 더듬음을 없애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적어 두었다.

그런데도 적는 까닭을, 그 아래 또 한 줄로 적었다. 더듬음을 없애지 못해도, 적어 두면 다음 손이 제 더듬음이 처음이 아님을 안다. 도경이 더듬었고 내가 더듬었으니, 다음 손의 더듬음도 그 줄에 잇닿은 더듬음이다. 혼자 더듬는 일과 잇닿아 더듬는 일은, 더듬는다는 점에서 같으나, 한쪽에는 앞선 더듬음의 기록이 있다. 그 기록이 더듬음을 멈추지는 못해도, 더듬는 손에게 혼자가 아님을 알린다. 적어 두는 일이, 다음 손의 더듬음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더듬음에 동행을 붙이는 일이었다. 부임한 다음 날, 내가 도경의 마지막 줄을 읽었을 때, 그 줄은 내 더듬음을 멈추지 못했으나, 도경도 같은 자리에서 더듬었음을 알게 했다. 그 앎이 여드레를 견디게 했다. 법칙을 알아서가 아니라, 앞서 더듬은 손이 있어서 견뎠다. 다음 손도 내 줄을 읽고, 법칙으로는 못 견디고 동행으로 견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법칙을 적되, 법칙이 소용없을 수 있음까지 적었다. 소용없음을 적은 그 줄이, 다음 손에게는 가장 소용 있는 줄일지도 몰랐다.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법칙 안에 없고 더듬음을 함께 적은 자리에 있었다.

법칙과 그 아래 두 줄을 다 적고, 색인함의 내 카드에 끼웠다. 카드 뒷면에 적은 그 글이, 다음 손이 부임한 다음 날 읽을 마지막 줄이 될 것이었다. 도경이 내게 남긴 마지막 줄을, 부임한 다음 날 내가 읽었듯이. 도경의 마지막 줄은 법칙 한 문장이었고, 내 마지막 줄은 그 문장에 한 토막을 더한 것과, 적어 둠이 소용없을 수 있다는 두 줄이었다. 도경보다 두 줄이 길었다. 그 두 줄이, 내가 보름을 더 살아 적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능동으로 한순간에 닫힌 도경이 못 적은 것을, 수동으로 보름을 옅어진 내가 적었다. 사슬은 아래로 갈수록 손이 줄었으나, 줄어든 손마다 적을 줄이 한 줄씩 늘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줄고, 적어 둘 줄은 늘었다. 다음 손은 나보다 또 한 가지를 못 할 것이나, 내 두 줄에 제 한 줄을 더해 세 줄을 남길 것이었다. 손이 줄고 기록이 느는 것이, 사슬이 이어지는 방식이었다. 잃는 만큼 적혔다.

적기를 마치자, 책상에 더 할 일이 없었다. 다섯 묶음도, 여섯째 묶음도, 색인도, 법칙도 다 적혔다. 보존하는 자로서 할 일을 다 했다. 단말의 내 줄은 마지막 한 자리가 옅어지는 중이었고, 그 한 자리가 다 옅어지면 나는 단말에서 사라질 것이었다. 사라지는 일만 남았다. 사라지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저 앉아 그것을 보았다. 보는 일이 보존하는 자의 마지막 일이었고, 보이는 일이 보존되는 자료의 마지막 일이었다. 두 마지막이 한 자리에서 겹쳤다. 보는 나와 보이는 나가 마지막으로 같은 한 자리를 들여다보았고, 그 자리가 옅어지고 있었다.

그때 단말의 한쪽에서, 그동안 한 번도 깜빡인 적 없던 칸이 깜빡였다. 본문 칸이 아니라 발신 칸이었다. 단말은 줄곧 받기만 했고, 발신 칸은 부임한 이래 줄곧 비어 어두웠다. 받는 자의 단말에는 보낼 일이 없었으므로. 도경의 일지에서, 발신 칸은 응답하는 자의 자리였다. 도경이 강민석의 이름 한 글자를 누른 곳이 발신 칸이었고, 그 한 번의 누름이 도경을 보내는 자로 만들었다. 나는 부임한 이래 발신 칸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쓸 일이 없었고, 쓰면 도경처럼 보내는 자가 될까 두려웠다. 그 두려움으로 비워 둔 발신 칸이, 오늘 내 본문 줄이 다 옅어지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깜빡였다. 그 어둡던 발신 칸이, 내 본문 줄이 마지막 한 자리로 옅어지는 순간, 처음으로 한 번 깜빡였다. 받기를 마친 자리에서, 보내려는 기척이 일었다. 다 받은 자가 보내는 자로 건너가려는 첫 기척이었다. 받던 손이 보내는 손이 되려는 자리에, 나는 와 있었다. 받기를 다 마친 자리가, 보내기의 첫 자리이기도 했다. 도경이 응답으로 보내는 자가 되었듯, 나도 다 받은 끝에 보내는 자가 되려는지, 발신 칸의 한 번의 깜빡임이, 옅어지는 내게 그것을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