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칠일. 아침 여덟 시. 다섯째 책상 앞에 앉았다. 하루가 남아 있었다.
뚜껑을 덮은 상자가 책상 한쪽에 놓여 있었다. 이관표에 도장은 아직 찍히지 않았다. 도장은 상부 담당이 내일 와서 찍을 것이었고, 도장이 찍히면 상자는 떠날 것이었다. 떠나기 전 하루 동안, 상자는 보내는 자리와 받는 자리 사이에 놓여 있었다. 아직 보내지 않았고, 아직 받지도 않은 자리. 어느 자리에도 속하지 않은 하루였다. 그 하루가, 내가 무언가를 고를 수 있는 마지막 하루인지도 몰랐다.
상자를 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했다. 보류하면, 묶음이 자료실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고,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다른 자료실로 퍼지지 않을 것이었다. 한 자리에 묶어 두면, 넓이로 퍼지는 일만은 막을 수 있을 듯했다. 깊이로 자라는 것은 못 막아도, 넓이로 번지는 것은 보류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자를 책상 밑으로 내려, 내일 도장을 피하면 되었다.
그러나 보류는 보내지 않는 일이었고, 보내지 않는 일은 이관하지 않는 일이었으며, 이관하지 않는 일은 직무 불이행이었다. 사월 팔일까지 이관을 마치라는 도장이 이미 확인서에 찍혀 있었으므로, 보류는 그 도장을 어기는 일이었다. 도경의 일지에서 본 것이 떠올랐다. 보존하지 않은 자리를 다른 손이 보존했듯, 이관하지 않은 상자도 다른 손이 이관할 것이었다. 내가 보류해도, 상부는 다른 담당을 보내 상자를 가져갈 것이고, 그러면 보류는 하루를 늦출 뿐, 막지는 못할 것이었다.
막지 못할 뿐 아니라, 보류에는 대가가 있었다. 부재에 대가가 있다는 것을, 도경의 일지가 적어 두었다. 옮기지 않은 숫자를 누군가 대신 옮겼듯, 이관하지 않은 상자를 누군가 대신 이관할 것이고, 그 누군가는 내가 보류함으로써 그 자리에 불려 온 사람일 것이었다. 내가 한 자리를 비우면, 그 자리에 다른 자리가 들어왔다. 보류는 내 자리를 비우는 일이었고, 비운 자리에 다른 손이 들어와 닫혔다. 막으려는 보류가, 다른 자리를 닫는 일이었다.
도경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도경은 닫히기 전에 한 사람을 더 닫을 수 있었으나, 막지 않기로 한 손을 비워 둠으로써 그 한 사람을 닫지 않았다. 막는 손은 닫히기 전에 한 사람을 더 닫고, 비운 손은 그러지 않는다고, 도경의 일지는 적었다. 나는 그 반대 자리에 있었다. 도경은 막지 않음으로써 한 사람을 살렸으나, 나는 막으려 함으로써 한 사람을 부르게 되어 있었다. 도경의 막지 않음과 내 막으려 함이, 거꾸로 같은 자리에서 갈렸다. 살리려는 일과 막으려는 일은 다른 일이었다. 도경은 살리려다 자리를 옮겼고, 나는 막으려다 자리를 불렀다.
이관이 가속이라는 것을, 떠나기 전 상자를 보며 알았다. 보존은 한 자리에서 한 손으로 자라게 했다. 이관은 그 한 자리를 여러 자리로 늘렸고, 한 손을 여러 손으로 늘렸다. 상자가 내 책상에 있을 때는 내 손 하나가 자라게 했으나, 상자가 상부로 가면 상부의 손이, 상부에서 또 어디론가 가면 그 손이 자라게 할 것이었다. 옮기는 일마다 손이 하나씩 늘었고, 손이 늘 때마다 자라는 자리가 하나씩 늘었다. 보존이 깊이의 일이라면 이관은 손의 일이었고, 손이 늘수록 빨라졌다. 한 손이 멈춰도 늘어난 손들이 이어 갔으므로, 이관은 멈출 손을 늘리는 일이기도 했다. 멈추려면 손을 멈춰야 했는데, 이관은 멈출 손을 늘리고 있었다. 처음에 도경의 자료실로 상자들이 모여들 때는, 법칙이 한 자리로 모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인 자리는 다시 흩어지는 자리였다. 한 자리로 모은 다음 그 자리를 상부로 올려 보내면, 모았던 것이 한꺼번에 더 높은 자리로 옮겨졌고, 더 높은 자리는 더 넓은 곳으로 다시 나눠 보냈다. 모이는 일과 흩어지는 일이 한 흐름의 두 박자였다. 들이쉬듯 모았다가 내쉬듯 흩었고, 내쉴 때마다 더 멀리 갔다.
상자를 책상 밑으로 내려 보았다. 발치에 두자, 묶음을 보지 않게 되어 한동안 마음이 놓였다. 보지 않으면 자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내려놓고 한 시간 뒤에 보니, 상자 안에서 종이 부푸는 소리가 들렸다. 마른 종이가 한 장씩 늘며 서로 밀리는, 아주 작은 소리였다. 뚜껑을 열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안에서 묶음이 자라는 것을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보지 않아도 소리는 들렸고, 소리를 들은 것도 관여였다. 눈을 돌려도 귀가 닿았다. 보류해도 깊이로는 자랐다. 넓이로 퍼지는 것을 막으려고 보류했으나, 보류한 상자 안에서도 깊이로 자랐고, 자란 만큼 뚜껑이 들떴다. 막으려는 일이 또 하나의 자리를 만들었다. 책상 밑이라는 자리. 자료실 안에 책상 위와 책상 밑이라는 두 자리가 생겼고, 두 자리 다 자랐다. 보류는 자리를 줄인 게 아니라 늘렸다.
상자를 다시 책상 위로 올렸다. 마분지 모서리가 손바닥을 긁었고, 올릴 때 안에서 묶음이 한쪽으로 쏠리는 무게가 느껴졌다. 어제보다 무거웠다. 내려도 자라고 올려도 자랐으므로, 어디 두든 같았다. 다만 책상 위에 두면 내일 도장이 찍혀 떠날 것이고, 책상 밑에 두면 도장을 어겨 다른 손이 와서 가져갈 것이었다. 떠나는 일은 같았고, 다른 것은 떠나보내는 손이 내 손이냐 다른 손이냐뿐이었다. 도경이 옮겨도 자기·안 옮겨도 자기였듯, 나는 보내도 떠나고·안 보내도 떠났다. 보내는 손이 내 손이면 내가 떠나보낸 것이 되었고, 다른 손이면 내가 보류해 부른 그 손이 떠나보낸 것이 되었다. 어느 쪽이든 상자는 떠났다.
상자를 책상 위에 두기로 했다. 내가 떠나보내는 편이, 다른 손을 불러 그 손을 닫게 하는 것보다 나았다. 도경이 마지막에 막지 않기로 한 손을 비워 둠으로써 한 사람을 더 닫지 않았듯, 나도 보류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손 하나를 부르지 않기로 했다.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다른 손을 끌어들이지는 않는 것. 그것이 내가 고를 수 있는 유일한 자리였다. 상자를 똑바로 놓고, 이관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보내는 이 칸의 내 이름이, 어제보다 한 자리 옅어져 있었다. 그때 단말이 깜빡였다. 본문 칸을 보니, 내 사번 아래로 새 줄이 한 자씩 도착하고 있었다. 단말은 줄곧 내 사번만 받아 왔으므로, 다른 줄이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새 줄의 앞자리를 내 것과 맞춰 보았다. 앞자리가 달랐다. 내 것이 아니었다. 사번의 앞자리는 입사 연차를 나타냈고, 그 앞자리는 나보다 한참 위였다. 자료실에서 나보다 윗자리는 한 사람뿐이었다. 사서장의 사번이었다. 내 자리로 오던 줄이, 이제 내 자리 곁의 자리로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