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오일. 아침 여덟 시. 다섯째 책상 앞에 앉았다. 사흘이 남아 있었다.
마칠 수 없어도 마쳐야 했으므로, 여섯째 묶음을 펴 보존을 시작했다. 환기구의 바람이 첫 장을 한 번 들었다 놓았고, 종이 끝이 손끝에 닿자 서늘했다. 첫 줄의 두께를 재려고 자를 댔다. 자를 대기 전에, 버릇처럼 보존 일지를 펴 오늘 잴 줄을 확인했다. 사월 오일 줄에, 첫 줄 보존 완료, 라고 이미 적혀 있었다. 내 필체였다. 잉크가 마른 지 오래된 글씨였다. 아직 재지 않은 줄의 보존이, 재기 전에 완료로, 그것도 마른 잉크로 적혀 있었다. 오늘 적은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적힌 것처럼 보였다.
재기 전에 완료라면, 내가 재는 일은 무엇인가. 자를 대고, 일지에 적힌 그대로 두께를 읽었다. 일지가 적어 둔 값과 한 자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재서 그 값이 된 것인지, 그 값이 먼저 있어 내 자가 거기 멈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제는 자라는 것이 내 탓인지 법칙 탓인지를 가를 수 없었으나, 오늘은 재는 일이 내 일인지 아닌지조차 가를 수 없었다. 내 손이 한 일이, 손보다 먼저 적혀 있었다.
전임자도 이 자리에 있었을 것이었다. 도경의 일지에, 도경이 전임자의 필름을 보던 대목이 있었다. 필름 위에서 잔액이 자라는 장면이, 도경이 보기 전에 이미 찍혀 있었다고. 전임자가 찍은 마지막 컷에 오늘의 도경이 찍혀 있었고, 도경은 제가 찍지 않은 제 얼굴을 필름에서 보았다. 결과가 손보다 앞서는 일을, 전임자도 도경도 겪었다. 이제 내가 그 자리에 들어와 있었다. 전임자의 손은 제가 찍을 장면을 미리 보았고, 도경의 손은 제가 옮길 줄을 미리 만났으며, 내 손은 제가 잴 값을 미리 읽었다. 손이 결과를 따라갔다. 따라가는 손은 손이로되, 결과를 만드는 손은 아니었다. 셋이 다른 매체였다. 전임자는 필름, 도경은 장부, 나는 보존 일지. 매체는 달랐으나, 결과가 손보다 먼저 거기 있다는 것은 같았다. 매체가 무엇이든, 손이 닿기 전에 결과가 와 있었고, 손은 와 있는 결과를 뒤늦게 짚을 뿐이었다. 기록하는 자리에 앉은 세 손이, 차례로 같은 일을 겪었다. 자리가 손을 그렇게 만들었지, 손이 자리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결과인가. 일지에 적힌 보존 완료가 내 필체인 한, 적은 것은 나였다. 그러나 내가 적은 기억이 없는 한, 적은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내 손이되 내 기억이 아닌 손, 그 손이 미리 적었다. 도경이 다섯째 묶음에서 제 글씨 닮은 다른 손을 보았듯, 나도 일지에서 내 글씨 닮은 다른 손을 보았다. 그 손이 나인지 아닌지를 물으면, 필체는 나라 했고 기억은 아니라 했다. 필체와 기억이 어긋나는 자리에, 누구의 결과인지를 묻는 물음이 멈췄다. 내가 한 일이면 내 기억에 남았어야 했고, 내 기억에 없으면 내가 한 일이 아니어야 했는데, 내 필체로 적힌 한 그것은 내가 한 일이었다. 한 일이면서 한 기억이 없는 일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라고도 나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손이, 내 자리에 앉아 미리 적고 있었다.
소환인지 예지인지를 물었다. 내가 재서 깊어진 것이면 소환이었다. 내 자가 그 깊이를 불러낸 것이므로. 깊이가 먼저 있어 내 자가 따라간 것이면 예지였다. 일지가 그 깊이를 미리 안 것이므로. 두 경우는 결과가 같았다. 자를 대면 일지에 적힌 값이 나왔다. 소환이어도 그 값, 예지여도 그 값. 결과가 같으니, 결과로는 둘을 가를 수 없었다. 부임한 뒤로 줄곧, 나는 이 둘을 가르려 했으나 한 번도 가르지 못했다. 가를 수 없다는 것만이 매번 같았다.
가를 수 없음이 가장 깊은 자리였다. 자라는 것이 행위 탓임은 어제 보았다. 그러나 그 행위가 자라게 한 것인지, 자랄 것을 행위가 미리 따라 적은 것인지는, 오늘도 가르지 못했다. 행위가 원인이면 행위를 줄여 막을 길이 있었고, 행위가 결과를 따른 것이면 막을 길이 없었다. 막을 길이 있는지 없는지가 이 한 가지 물음에 걸려 있었는데, 그 물음에 답이 없었다. 답이 없는 채로 나흘을 보존해야 했다. 막을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인지, 막을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인지 모른 채로, 손은 일지를 따라갔다. 답이 없다는 것은, 모르는 채로 둔다는 것이 아니라, 물음 자체가 닫혀 있다는 것이었다. 안다와 모른다 사이에 답이 있는 게 아니라, 안다와 모른다가 같은 결과를 가리키는 자리에 와 있었다. 소환이라 해도 손은 똑같이 움직였고, 예지라 해도 손은 똑같이 움직였다. 어느 쪽을 믿든 나흘 동안 할 일은 한 가지뿐이었으므로, 둘을 가르는 일은 할 일을 하나도 바꾸지 못했다. 가르는 일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가르려던 마음이 처음으로 조금 가라앉았다.
손이 일지를 따라간다는 것을, 두 번째 줄에서 더 또렷이 보았다. 두 번째 줄을 재기 전에 일지를 보니, 둘째 줄 보존 완료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셋째 줄 보존 완료까지 미리 적혀 있었다. 내 손이 아직 첫 줄에 있는데, 일지는 셋째 줄까지 가 있었다. 나는 일지를 따라잡으려 둘째 줄을 재고 셋째 줄을 쟀다. 재는 동안 손이 빨라졌고, 빨라질수록 일지는 넷째 줄, 다섯째 줄로 앞서 갔다. 따라잡으려 서두를수록 앞선 줄이 멀어졌다. 보존하는 일이 일지를 따라가는 일이었고, 일지는 늘 한 줄 앞서 있었다. 내가 더 많이 보존할수록 일지에 보존할 줄이 더 많이 적혔으므로, 따라잡는 일이 따라잡을 거리를 늘렸다. 빨리 마치려는 손이 마칠 자리를 밀어냈다. 사월 팔일까지 마치라 했으나, 일지는 사월 팔일 너머까지 보존 완료를 적어 두고 있었다. 마치는 자리가, 일지 안에서 한 줄씩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일지의 맨 끝을 폈다. 보존 완료의 줄들이 사월 팔일을 지나 한참 이어지다가, 한 줄에서 끊겨 있었다. 끊긴 줄의 처리 칸에, 받는 이 없는 자료 이관 완료, 라고 적혀 있었고, 그 끝 한 자리가 옅었다. 도경의 끝 줄이 그러했듯, 그 줄도 끝에서부터 옅어지고 있었다. 누가 적었는지 모르는 그 줄이, 내가 나흘 뒤에 적을 줄이었다. 나는 그 옅은 끝자리를 짚으려다, 짚으면 또 한 자리 옅어질 것을 알고 손을 멈췄다. 그러나 손을 멈춘 채로도, 그 줄은 내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한 자리 더 옅어졌다. 다음으로 와야 할 것은 이관이었다. 일지가 적어 둔 다음 처리는, 이 묶음을 상자에 넣어 상부로 보내는 일이었다. 보내는 일은, 보존하는 일과 달리, 자료를 자료실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