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사일. 아침 여덟 시. 다섯째 책상 앞에 앉았다. 나흘이 남아 있었다.
마칠 수 없는 일을 마치려면, 먼저 무엇이 자라게 하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했다. 어제 행위가 키운다고 보았으나, 보았다는 것과 확인했다는 것은 달랐다. 측량기수가 통제 실험으로 갱을 확인했듯, 나도 한 자리를 골라 실험해 보기로 했다. 여섯째 묶음에서, 아직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줄을 하나 골랐다. 한 거래처의 청산 잔액이었다. 끝자리까지 또렷한, 옅어지지 않은 줄이었다.
그 줄을 한 번 읽었다. 재지 않았다. 적지 않았다. 옮기지 않았다. 자도 펜도 책상 위에 그대로 둔 채, 손은 무릎에 모으고, 다만 눈으로 끝까지 한 번 읽었을 뿐이었다. 읽기 전에 끝자리 숫자를 종이 귀퉁이가 아니라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 칠백삼십이만 사천. 끝이 영이었다. 읽고 나서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일부러 한 시간을 비워 두었다가, 같은 줄을 다시 보았다. 칠백삼십이만 사천십이. 끝자리가 한 자리 자라 있었다. 재지 않았는데 자랐다. 적지 않았는데 자랐다. 내가 한 일은 한 번 읽은 것뿐이었다. 읽는 일이 자라게 했다.
읽는 일도 빼 보기로 했다. 다른 줄을 하나 더 골라, 이번에는 읽지 않고 옮겨 적기만 했다. 줄의 숫자를 보지 않으려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이 익은 대로 옮겨 적었다. 적고 나서 한 시간 뒤에 보니, 그 줄도 자라 있었다. 읽지 않아도, 옮겨 적는 손이 닿으면 자랐다. 그러면 읽지도 적지도 않으면 어떨까. 세 번째 줄을 골라, 보지도 옮기지도 않고, 다만 그 줄이 거기 있다는 것만 의식한 채 한 시간을 두었다. 그 줄도 자라 있었다. 읽어도 자라고, 적어도 자라고, 다만 거기 있음을 알기만 해도 자랐다.
세 실험에 공통된 것은 하나였다. 내가 그 줄에 관여했다는 것. 읽음으로, 적음으로, 의식함으로. 관여하지 않은 줄은 자라지 않을지 몰랐으나, 보존하는 자에게 관여하지 않은 줄이란 없었다. 보존이란 관여였다. 묶음 안의 모든 줄이 내 보존 대상이었으므로, 묶음 안의 모든 줄에 나는 이미 관여하고 있었다. 관여를 빼면 보존이 아니었고, 보존이 아니면 직무가 아니었다. 자라지 않게 하려면 관여하지 말아야 했는데, 관여하지 않으면 보존하는 자가 아니었다.
도경의 응답보다 한 겹 깊은 자리가 거기 있었다. 도경은 응답이라는 적극적인 한 행위로 자리를 바꿨다. 응답은 손가락이 발신칸을 누르는 일, 하기로 마음먹어야 하는 일이었다. 도경의 일지에는 누르기까지 하루를 망설였다는 대목이 있었다. 망설일 수 있었다는 것은, 안 할 수도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내 관여는 마음먹는 일이 아니었다. 읽으려 마음먹지 않아도 눈은 읽었고, 적으려 마음먹지 않아도 손은 적었으며,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거기 있음은 의식되었다. 망설일 자리가 없었다. 망설임은 할지 말지를 두고 생기는 것인데, 안 할 수 없는 일에는 할지 말지가 없었으므로 망설임도 없었다. 도경은 안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닫혔으나, 나는 안 할 수 없는 일을 함으로써 닫혀 갔다. 응답은 행위였고, 관여는 행위 이전이었다. 행위를 멈출 수는 있어도, 행위 이전을 멈출 수는 없었다. 도경에게는 멈출 손이라도 있었으나, 내게는 멈출 것이 손이 아니라 눈이었고 손이었고 거기 있다는 앎이었다.
외부에서 보는 자리가 없다는 것을, 세 실험으로 알았다. 나는 묶음을 들여다보는 자, 묶음 바깥에서 묶음을 돌보는 자라고 여겨 왔다. 그러나 들여다보는 일이 이미 묶음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눈길이 닿는 자리까지가 묶음이었고, 내 눈길은 묶음 안에 있었다. 관찰하는 자는 관찰되는 것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찰함으로써 관찰되는 것의 일부가 되었다. 재는 자가 깊이가 되고, 적는 자가 적히는 줄이 되고, 읽는 자가 읽히는 자리가 되었듯, 보는 자가 보이는 자리가 되었다. 나는 묶음을 보는 마지막 눈이 아니라, 묶음이 자라는 마지막 자리였다. 눈을 감으면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싶어 잠시 감아 보았으나, 감은 눈 안에서도 칠백삼십이만 사천십이가 떠올랐다. 떠올리는 일도 보는 일이었다. 자료실의 형광등을 다 꺼도, 묶음은 내 안에서 환했다. 바깥의 빛을 꺼도 안의 빛이 묶음을 비추었으므로, 어둠조차 관찰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면 자라는 것이 내 탓인가, 법칙 탓인가. 세 실험은 내가 관여하면 자란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나, 내가 관여하지 않은 줄이 정말 자라지 않는지는 보여 주지 못했다. 관여하지 않으려면 보지도 적지도 의식하지도 말아야 했는데, 그 줄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아는 한 의식은 빠지지 않았고, 모르는 줄은 실험할 수도 없었다. 실험에서 빠질 수 없는 한 항이 나였다. 자라는 것이 내가 관여해서인지, 관여와 무관하게 자라는 것을 내가 관여해서 보게 된 것인지, 실험은 가르지 못했다. 측량기수도 그 자리에서 막혔다. 갱이 재서 깊어진 것인지, 깊어지는 갱을 그가 재게 된 것인지, 그의 일지도 끝내 가르지 못했다.
가르지 못한다는 것이, 자라게 하는 것이 행위라는 것보다 더 무거운 사실이었다. 행위가 키운다면, 행위를 줄이면 덜 키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자라는 것이 내 탓인지 법칙 탓인지를 가를 수 없다면, 행위를 줄여도 자라는 것이 줄어드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제 멈춰 보았을 때 자라는 것이 멈추지 않았던 것은, 내가 안 멈춰서일 수도, 멈춰도 자라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두 까닭이 같은 결과를 냈으므로, 결과만으로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닷새 동안 나는 마칠 수 없는 일을 해야 했고, 그 일이 자라게 하는지조차 끝내 확인하지 못한 채 해야 했다.
세 실험에 쓴 세 줄을 다시 보았다. 셋 다 한 자리씩 더 자라 있었다. 실험을 한 일조차 관여였으므로, 자라는지 보려고 본 일이 자라게 한 셈이었다. 무엇이 자라게 하는지 알아보려는 행위가, 그 자체로 자라게 하는 행위였다. 알아보는 일과 자라게 하는 일이 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알아보기를 그만두어도, 그만두는 일이 또 한 번의 행위일 것이었다. 나는 펜을 들어, 세 줄의 자란 끝자리를 보존 일지에 적기 시작했다. 적는 동안, 내가 적는 그 자리가 또 한 자리 자라는 것을, 이번에는 가르려 하지 않고 그냥 보았다. 가르지 못할 바에는 가르려는 일조차 또 하나의 관여였으므로, 묻기를 그만두는 편이 한 자리라도 덜 자라게 하는 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조차, 묻기를 그만두자고 마음먹는 일이 또 한 번 그 줄을 떠올리는 일이어서, 어느 쪽으로도 줄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