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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묶음

The Fifth Bund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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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분

십일월 초닷새. 어젯밤에 상자를 덮고 그대로 두었다.

다섯 시 반에 손이 멎은 뒤로 스무 분쯤 앉아 있었다. 꺼내 볼 수도 있었고 세어만 볼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덮었다.

덮은 까닭을 오늘 아침에 적어 보려다 못 적었다. 서식에 까닭 칸이 없다.

아홉 시 반에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여섯을 늘어놓았다.

등대수와 측량기수와 전신수와 사서. 넷은 정월부터 있다. 노트가 하나 있고 그것도 정월부터 있다. 여섯째가 어제 왔다.

넷은 손으로 쓴 일지를 실로 묶은 것이다. 겉장이 있고 안쪽 표지에 출판소 인장이 있고 끝 장 아래에 같은 한 줄이 박혀 있다. 노트는 공책 한 권이다. 표지가 있고 뒤표지 안쪽에 인장 자국이 있다.

여섯째에는 겉장이 없다. 첫 장이 바로 글씨다.

종이는 회사 괘지다. 자료실에서 쓰던 종이로 지금도 서고 셋째 칸에 남아 있다. 장 아래 오른쪽에 번호가 손으로 적혀 있다. 잉크가 두 가지다. 파랑이 많고, 검정이 뒤쪽에 섞인다.

첫 장 오른쪽 위에 이름 하나가 있다.

열 시부터 열한 시까지 앞쪽 열두 장을 읽었다.

칸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글이다. 수를 적은 자리에도 칸이 없다. 옮긴 수와 원본의 수를 나란히 적어 두고 그 아래에 줄글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적는다.

셋째 장에 이런 줄이 있다. 오늘 옮긴 수가 원본보다 크다. 세 번 세었고 세 번 다 크다. 손이 틀린 것이면 세 번 다 같은 쪽으로 틀려야 한다.

여덟째 장에 이런 줄이 있다. 어제 고친 자리가 오늘 둘이 되었다.

내가 칠월에 적은 문장이 그것이다. 어제 보탠 하나가 오늘 셋이라고 적었다. 셋과 둘이 다르고 나머지가 같다.

첫 장에는 상자 이야기가 있다. 폐업한 출판사에서 온 상자 하나를 받았고 안에 묶음이 넷이라고 적혀 있다. 받은 날짜가 구십칠년 시월 스무이레다.

그 상자가 지금 내 책상 아래 있다. 두 해 전에 넷이었고 오늘 여섯이다.

열한 시까지 읽고 손을 멈추었다.

내 일지에는 칸이 있고 칸 밖의 문장이 아홉이다. 오른쪽 일지에는 칸이 있고 칸 밖의 문장이 열일곱이다. 이 묶음에는 칸이 없다.

그러면 전부가 칸 밖이다.

세어 볼 수가 없다. 셀 수 있는 것은 칸이 있는 데뿐이다. 칸이 있어야 안과 밖이 있고 밖에 있는 것을 셀 수 있다. 칸이 없으면 밖도 없고 셈도 없다.

산정 불가라고 적고 나서 사흘 전에 세운 근거를 다시 보았다.

칸 밖으로 나간 것이 사람이라고 했다. 어제는 그 근거가 오른쪽과 왼쪽을 안 가른다고 적었다. 오늘 하나를 더 안 가른다.

그 근거로 보면 이 묶음이 가장 사람이다. 한 줄도 칸 안에 없다.

같은 근거로 보면 네 묶음도 사람이다. 넷 다 칸이 없다. 그 넷의 사람은 예순 해도 더 전 사람이고 그 뒤가 어떻게 됐는지 넷 다 적혀 있지 않다. 등대수의 마지막 장은 조수표 한 줄에서 끊기고 전신수의 것은 시각만 적힌 줄에서 끝난다.

근거가 산 사람과 없어진 사람을 안 가른다. 여덟 달 동안 이 방에서 근거를 세울 때마다 근거가 가르려던 둘을 붙여 놓았다.

열한 시 반에 서고에 내려가 구십칠년 종이 대장을 꺼냈다.

기재자 칸에 이름이 든 줄이 여든두 줄이다. 지난달에 세어 두었다.

열 자를 골라 묶음의 글씨와 대조했다.

같았다.

경 자의 갈고리가 오른쪽으로 길게 빠진다. 여든두 줄에 다 그렇고 묶음에도 그렇다. 도 자의 첫 획이 짧고 둘째 획이 길다. 그것도 같다. 대장은 붓펜이고 묶음은 볼펜이라 굵기가 다르다. 굵기가 다른데 빠지는 자리가 같다.

한 달 동안 김도경은 칸에 든 글자였다. 화면에 뜨면 글자였고 종이에 있으면 손글씨였으나 그 손글씨도 칸 안에 있었다. 칸 안의 글씨는 이름이고 이름은 사람의 자리만 표시한다.

오늘 그 손이 칸 밖에서 열두 장을 썼다.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다. 필체를 만났다.

시월 열이레에 인사부와 명부와 층을 차례로 적어 놓고 물어볼 데가 없어졌다고 적었다. 그때 남은 것이 대장뿐이었다. 오늘 하나가 늘었는데 이것도 물어볼 데는 아니다. 적힌 것이 늘면 물을 것이 늘고 물어볼 데는 안 는다.

한 시부터 세 시까지 카드를 했다. 이백 장을 했다. 열두째 서랍에 사백 장쯤 남았고 이틀이면 끝난다.

두 시에 삼층에서 전화가 왔다. 시월 서른하루 자 그 건이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다. 본사가 십일월 말 정리 지침에 넣기로 했다고 했다. 그가 그러면 그때까지 대장에 그대로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그가 알겠다고 하고 끊었다.

그 줄은 서른엿새째 그대로 있다.

세 시에 노트를 폈다.

뒤표지 안쪽에 인장 자국이 있다. 정월에 세어 다섯이라고 적었다. 칠월에 세어 여섯이었고 여섯째는 앞의 다섯보다 얕고 인주가 없었다.

오늘 세어 보니 여섯이다.

세 시 반부터 네 시 반까지 자국과 물건을 맞춰 보았다.

정월에 이 상자에 든 것이 다섯이었다. 네 묶음과 노트다. 그때 자국이 다섯이었다.

칠월에 자국이 여섯이 되었다. 그때 물건은 다섯이었다.

어제 물건이 여섯이 되었다.

자국이 백일곱 날 먼저 여섯이었다.

백칠 일 먼저라고 적고 나서 여섯째 자국의 임자를 정해 보려 했다.

어제 온 묶음의 것이라면 자국이 물건보다 먼저 왔다. 이 방에서 그런 일은 여덟 달 동안 여러 번 있었다. 사본이 하루 먼저 적었고 목록이 먼저 떴고 접속 기록이 먼저 찍혔다. 여섯째 자국도 그 줄에 세우면 자리가 맞는다.

내 것이라면 자국은 칠월에 생겼고 물건은 아직 이 상자에 없다. 내 일지는 삼층 캐비닛에 있고 백일흔여섯 장이다.

둘 다 맞는다. 하나를 고를 근거가 없다.

자국을 들여다보는 동안 세 번째 것이 떠올랐다. 노트를 쓴 사람의 것일 수도 있다. 노트는 정월부터 여기 있고 그때 자국은 다섯이었으므로 그 다섯 중에 하나가 그 사람 것일 수 있다. 그러면 여섯째는 다시 비고, 물건 여섯과 자국 여섯이 맞는 것이 우연이 된다.

셋을 적어 놓고 보니 셋 다 셈이 맞는다.

다섯 시 십 분에 오른쪽 자료를 열었다.

백일흔여섯 장이었다.

늘어난 장의 날짜가 구십칠년 십이월 열여드레다. 종료일 표시는 그대로 십이월 열엿새다. 이틀을 넘겼다.

다섯 시 이십 분에 등록 서식을 꺼냈다.

미등록 물품이 하나 늘었고 늘어난 것은 등록해야 한다. 서식에 기간 칸이 있다. 첫 장 일자와 마지막 장 일자를 적는 칸이다.

첫 장을 폈다. 구십칠년 시월 스무이레다.

마지막 장을 찾아 뒤에서부터 넘겼다.

글씨가 있는 마지막 장이 나왔다.

날짜가 십이월 열엿새다.

연도 칸이 비어 있었다.

이 방에 십이월 열엿새가 둘 있다. 오른쪽 자료의 종료일이 구십칠년 십이월 열엿새이고 노트의 마지막 날이 구십팔년 십이월 열엿새다.

이 묶음의 열엿새는 어느 해에도 안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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