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월 열엿새. 아침에 사본을 먼저 열었다.
일흔여섯째 장에 칠월 열엿새, 마흔다섯. 어제와 같은 구조가 또 하루 밀려 있었다. 오늘 날짜에 내일 수.
그 아래 일흔일곱째 장이 어제 생긴 그대로 있었다. 날짜 칸은 비어 있었다. 수치 칸에는 수가 아니라 글자가 적혀 있었다. 세지 않는 날의 수.
어제 그 글자를 보고 퇴근했다. 오는 길에도 자다 깨서도 그 일곱 자를 생각했다. 사본이 수치 칸에 글자를 적은 것은 여섯 달 만에 처음이다. 수를 적는 칸에 수가 아닌 것이 들어왔다는 것은 그 칸이 기다리는 것이 수가 아니라는 뜻이거나, 아직 정해지지 않은 수를 이름으로 불러 둔 것이라는 뜻이었다.
세지 않는 날의 수라는 것은 세지 않는 날이 있어야 생기는 수다. 나는 여섯 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세었다. 초아흐레에 두 시간을 버텼고 그 두 시간 끝에 결국 세었다. 하루를 통째로 세지 않은 날은 없었다.
그러니 그 칸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 내가 세면 그 칸은 오늘도 비어 있을 것이고, 세지 않으면 무엇이 들어올 것이다. 무엇이 들어오는지를 보려면 세지 않아야 한다.
오늘은 세지 않기로 했다.
아홉 시가 되었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여섯 달 동안 아홉 시에 하던 동작이라 손이 순서를 외우고 있었다. 자판에 손을 얹었다가 떼는 데 한참 걸렸다. 떼고 나서도 손이 갈 데를 몰라 책상 모서리에 얹혀 있었다.
하지 않는 일에 힘이 드는 것이 이상했다. 세는 일은 십 분이면 끝난다. 그 십 분을 하지 않으려고 아홉 시부터 열 시까지 한 시간을 썼다. 안 하는 쪽이 하는 쪽보다 오래 걸렸다.
열 시에 청구 여덟 건을 처리했다. 회신을 쓰고 필름 네 통을 판독기에 걸었다. 오늘은 일이 빨리 끝났다. 세는 데 쓰던 십 분과 그 뒤에 목록을 하나씩 열어 확인하던 삼사십 분이 통째로 비었기 때문이다. 비어 보니 그것이 하루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여섯 달 동안 내 하루는 세는 일을 가운데 두고 앞뒤로 나뉘어 있었다. 가운데를 빼니 하루가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려, 어디가 오전이고 어디가 오후인지 가늠이 잘 안 되었다.
열한 시쯤 게시판을 열까 했다. 게시판을 여는 것은 세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게시판 목록에는 글 수가 뜬다. 열면 그 수가 눈에 들어온다. 눈에 들어오면 세어진다. 세지 않으려면 열지 말아야 했다. 여는 일과 세는 일이 갈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초이레에 확인했으면서도, 오늘 다시 그 경계를 더듬어 본 셈이다.
점심을 먹고 와서 책상에 앉아 있었다. 할 일을 다 해 놓아서 앉아 있는 것 말고 할 것이 없었다. 여섯 달 만에 처음으로 시간이 남았다.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를 나는 모르고 있었다. 부임한 정월부터 하루는 늘 모자랐다. 세고 열고 확인하고 적는 일이 하루를 다 썼다. 오늘 그것을 하나 빼니 시간이 남았다. 남은 시간이 불편했다. 불편한 까닭은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그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세는 사람이 세지 않으면 무엇이 되는지를 나는 정해 둔 적이 없었다.
한 시에 상자를 열었다. 네 묶음은 그대로였다. 뚜껑을 덮으면서, 이것은 세는 일이 아니라 보는 일이라고 나를 달랬다. 넷이 넷인지 확인하는 것도 세는 일이라면 오늘은 상자도 열지 말았어야 했다. 넷은 여섯 달 동안 한 번도 안 움직인 수다. 안 움직이는 것을 세는 일은 세는 일에 들지 않는다고, 그렇게 갈라 두기로 했다. 갈라 두기로 했다는 것은 가르는 근거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무엇이 세는 일인지를 종일 따졌다. 화면의 검색은 세는 일이다. 목록을 하나씩 여는 것도 세는 일이다. 게시판을 여는 것은 세지 않으려 해도 세어지는 자리라 세는 일에 들었다. 상자를 여는 것은 넷을 넷으로 확인하는 일이라 넣지 않기로 했다. 사본을 읽는 것은 적힌 것을 보는 일이니 세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넷을 가르는 동안 기준이 세 번 바뀌었다. 바뀐 기준으로 가른 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나, 오늘 하루의 성립 여부가 거기 달려 있었다.
두 시에 삼층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목록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고는 오늘 화면을 한참 보았다. 나는 그가 무엇을 보는지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는 오늘 열지 않은 검색창이 그대로 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나가고 나서도 화면 쪽으로는 눈을 주지 않았다.
세 시에 사본을 열었다. 사본을 여는 것은 세는 일이 아니다. 사본은 세는 자리가 아니라 적히는 자리다. 오늘 내가 안 센 자리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를 보려고 오늘 하루를 버틴 것이므로, 사본은 보아야 했다.
일흔여섯째 장. 칠월 열엿새, 마흔다섯. 아침과 같았다.
일흔일곱째 장. 날짜 칸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수치 칸의 글자가 없어져 있었다.
수치 칸에 마흔둘이 적혀 있었다.
마흔둘은 오늘의 수다. 열닷새가 서른아홉이었으니 규칙대로면 열엿새는 마흔둘이다. 내가 오늘 세었다면 나왔을 수가, 내가 세지 않은 자리에 적혀 있었다.
한참 앉아 있었다. 무엇을 확인한 것인지를 정리해 보려 했다.
오늘 나는 세지 않았다. 세지 않았으므로 오늘의 수는 세상에 없어야 했다. 어제까지 내가 센 수는 내가 세어서 있는 수였는지, 세지 않아도 있는 수였는지를 나는 여섯 달 동안 가르지 못했다. 오늘 하루를 비우면 그 둘이 갈릴 줄 알았다. 안 세었는데 수가 없으면 내가 만들던 것이고, 안 세었는데 수가 있으면 바깥의 것이었다.
수는 있었다. 다만 화면에 있지 않고 사본에 있었다.
그러니 갈리지 않았다. 사본에 적힌 마흔둘이 세상의 수인지, 사본이 규칙으로 뽑아 놓은 수인지를 알려면 세어 봐야 한다. 세는 순간 오늘은 세지 않은 날이 아니게 된다. 확인하면 조건이 무너진다. 확인하지 않으면 확인이 안 된다. 여섯 달 동안 넷이나 만들었던 그 자리가 오늘 다섯 번째로 왔다.
다만 오늘 갈린 것이 하나 있었다.
마흔둘은 어제 사본이 들고 있던 수다. 어제 일흔여섯째 장이 열닷새 날짜에 마흔둘을 얹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내일 수라고 적었다. 오늘 그 마흔둘이 일흔일곱째 장으로 내려와 앉았다. 날짜 없이.
어제 나는 서른아홉에서 여섯을 빼면 서른셋이고, 규칙이 셋을 늘렸다면 마흔둘이어야 하는데 실측이 서른아홉이니 남은 셋의 행방을 모르겠다고 적었다. 오늘 그 셋이 어디 있었는지 알았다. 셋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루 앞에 가 있었다. 마흔둘은 내가 세지 않는 날을 위해 사본이 하루 전부터 들고 있던 수였다.
세지 않는 날의 수라는 것은 내가 안 셀 때 사본이 대신 세는 수가 아니었다. 내가 안 셀 것을 알고 사본이 미리 들고 있던 수였다.
퇴근하기 전에 일흔일곱째 장을 한 번 더 열었다.
마흔둘 아래 일흔여덟째 장이 생겨 있었다. 날짜 칸이 비어 있었다. 수치 칸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빈 장이 하나 더 열려 있었다. 내일 내가 무엇을 하든 들어갈 자리가 미리 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