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월 초, 나라가 구제금융을 신청했다는 소식이 라디오를 메웠다. 외환보유고가 바닥났다고 했다. 더는 갚을 달러가 없어, 바깥의 기구에 손을 벌렸다고. 위층의 종금사 한 곳이 무너지는 것과, 나라 하나가 손을 드는 것은 규모가 달랐다. 그러나 나는 그 둘이 같은 일임을 알았다.
자료실로 한 묶음의 문서가 내려왔다. 보유고 통계 원장. 나라가 가졌다고 공표한 외환의, 월별 합계. 나는 그것을 필름에 옮기는 일을 맡았다. 공식 숫자를 한 줄씩 읽으며, 나는 분절된 눈으로 그 아래를 보았다. 공표된 보유고 합계가 한 칸에 있었고, 그 칸의 글자와 글자 사이, 본래 아무것도 없어야 할 틈에, 다른 숫자가 있었다.
공표된 보유고는 컸다. 그러나 틈으로 읽은 숫자 — 실제로 쓸 수 있는, 묶이지 않은, 빌리지 않은 보유고 — 는 그보다 훨씬 작았다. 거의 영(零)에 가까웠다. 두 숫자는 같은 칸에 겹쳐 있었다. 위의 것은 장부에 적힌 수였고, 아래의 것은 장부 아래에 자란 수였다.

나는 이제 그 메커니즘을 안다. 보유고를 크게 적을수록, 그것을 지키려 끌어 쓴 단기 차입은 더 늘었다. 큰 숫자를 공표하는 행위 자체가, 그 아래에서 갚을 빚을 키웠다. 내 책상의 잔액이 옮겨 적을 때마다 자랐듯이, 나라의 보유고는 공표할 때마다 속이 비었다. 한 종금사가 그러했고, 나라가 그러했다. 법칙에는 규모가 없었다. 자료실 한 칸과 국가의 금고가 같은 크기였다.
위층 사람들은 나라가 '구제'받는다고 했다. 구원처럼 들리는 말. 그러나 구제(救濟)는 무너진 뒤에 오는 것이다. 미리 적힌 명단의 한 줄이 끝내 참이 된 뒤에. 구제금융이란, 나라가 제 장부 아래의 참 숫자를 마침내 바깥에 내보인 일이었다 — 더 감출 수 없어서. 내가 단말 앞에서 마주한 것을, 온 나라가 같은 날 마주한 것이다.
보유고 원장의 마지막 장, 가용 보유고가 영에 닿는 칸의 날짜를 나는 보았다. 그 날짜는 구제를 신청한 오늘이 아니었다. 아직 오지 않은 날, 십이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칸의 여백에, 익숙한 한 줄이 작게 찍혀 있었다 — 회사 장부에도, 네 묶음의 표지에도 있던 그 서명이. 보유고가 바닥나는 그 칸을, 이미 누군가 '대신 적어' 두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회사의 가장 오래된 장부를 꺼냈다. 자료실이 생긴 이래의 총괄 원장. 표지는 닳았고 종이는 누랬다. 나는 그것을 펼쳐, 처음으로 한 가지를 시험했다. 공식 합계가 적힌 줄을, 등불에 비추어 — 그 아래를 읽는 일을.
종이는 한 겹이 아니었다. 공식 숫자가 적힌 면 아래, 비쳐 보이는 다른 면에, 또 하나의 합계가 있었다. 같은 항목, 같은 날짜. 그러나 다른 숫자. 더 큰 숫자. 공식 장부의 모든 줄 아래에는, 줄곧 그 줄보다 큰 참 숫자가 비쳐 있었다. 나는 그제야 제목을 이해했다. 장부 아래의 숫자. 그것은 비유가 아니었다. 참 숫자는 늘 장부 '아래'에 있었다. 위의 숫자는 뚜껑이었다. 아래에서 자라는 것을 덮어 둔, 얇은 뚜껑.

부도도, 강등도, 환란도, 보유고의 영도 — 새로 생긴 일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장부 아래에서 줄곧 자라다가, 위의 뚜껑이 더는 누르지 못하는 날 표면으로 솟은 것이었다. 인출 사태는 사람들이 그 뚜껑을 한꺼번에 들춘 일이었다. 구제금융은 나라가 제 뚜껑을 스스로 연 일이었다. 아래의 숫자는 그 전부터 거기 있었다. 다만 아무도 아래를 읽지 않았을 뿐.
나는 아래의 면을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참 숫자의 합계는 한 사람의 글씨가 아니었다. 여러 손이 이어 적은 하나의 누계였다. 나는 그 필체들을 알아보았다. 깊이를 적은 손, 물때를 적은 손, 음절을 적은 손, 빈 주파수를 적은 손. 그리고 한성█의 손. 그들은 각자의 시대에, 각자의 장부 아래에서, 같은 하나의 참 숫자에 제 몫을 더해 왔다. 갱의 깊이도, 조수의 높이도, 외채의 합계도 — 단위만 달랐지 같은 누계의 항이었다.
누계의 맨 아래, 가장 최근의 항 다음에, 빈 줄이 하나 있었다. 한성█의 손이 더한 마지막 항 아래. 그 줄은 비어 있었으나, 비어 기다리는 줄이었다. 측량기수의 마흔여덟 번째 줄처럼. 인사철의 일곱 번째 줄처럼. 참 숫자의 누계는, 다음 항을 적을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빈 줄 옆 여백에, 옅은 글씨로 항목명이 미리 적혀 있었다. 다음에 더해질 항이 무엇인지를. 그것은 외채도, 환율도, 보유고도 아니었다. 그 항의 이름은 — 김도경이었다.
십이월 육일. 수렴하는 날짜까지 며칠이 남지 않았다. 나는 두 가지를 책상에 나란히 놓았다. 전임자의 끊긴 문장이 적힌 일지와, 참 숫자의 누계가 다음 항을 비워 둔 총괄 원장. 둘은 같은 한 가지를 나에게 물었다. 적을 것인가, 적지 않을 것인가.
나는 적지 않는 길을 이미 시험했다. 그것은 길이 아니었다. 칸을 비우면 '우리'가 대신 적었고, 대신 적힌 숫자는 내가 적을 것보다 컸다. 응답하지 않아도 응답은 도착했고, 찍지 않아도 누군가 찍었다. 부재는 멈춤이 아니라 통제의 포기였다. 그러니 선택지는 처음부터 둘이 아니었다. 자라느냐 멈추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손이 적느냐. 그뿐이었다.
나는 네 사람과 한 사람을 생각했다. 등대수도, 측량기수도, 사서도, 전신수도, 한성█도 — 그들은 어리석어서 끝까지 읽고 응답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나처럼 이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비워 두어도 채워지는 칸 앞에서. 그리고 깨달았을 것이다. 참 숫자를 누군가는 옮겨 적어야 한다면, 그것을 모르는 손보다는 아는 손이 적는 편이 낫다는 것을. 적는 자가 끊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펜을 들었다. 그것이 그들이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므로 — 다음 독자에게 건넬, 끝까지 읽은 한 줄.
읽기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십일월에 끝까지 읽었다. 음절은 이미 따로 도착했고, 눈은 이미 칸 사이를 읽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그때 일어났다. 남은 것은, 그 읽음을 손으로 옮기느냐 마느냐. 그러나 그것조차 진짜 선택은 아니었다. 적지 않으면 '우리'가 적을 테니까. 진짜 선택은 단 하나 — 그 한 줄을 내 손으로 적어, 내 글씨로 남기는 것. 빼앗기지 않는 것.
나는 펜을 들었다.
전임자의 끊긴 문장 다음 칸에 펜을 댔다. '장부 아래에서 자라는 참 숫자를, 나는 이제 옮겨 적기로—'. 그가 멈춘 그 자리. 나는 다음 한 글자를 적었다. 그리고 그 문장을, 처음으로, 마침표까지 끝맺었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 펜 끝이 잠시 떨렸다. 나는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았다. 전임자의 문장이 마침내 끝났다는 것 — 그가 멈춘 자리를 내가 이어 닫음으로써. 그리고 그 대가로, 끊기는 사람이 이제 그가 아니라 나라는 것. 그러나 두렵지 않았다. 두려움은 모르는 자의 것이다. 나는 알고 적었다. 그것이 다르다고, 나는 믿기로 했다.
나는 총괄 원장의 빈 줄로 펜을 옮겼다. 참 숫자의 누계, 여러 손이 이어 온 그 하나의 합계. 그 다음 항 — '김도경'이라 미리 적혀 있던 줄 — 에, 나는 내 몫의 숫자를 적었다. 내가 십일월 내내 읽은 모든 것의 합. 늘어난 잔액, 빠지지 않는 물때, 부도 아래의 등급, 영을 향한 보유고. 그 전부를 하나의 수로 옮겨, 누계에 더했다. 측량기수가 깊이를 더했듯, 등대수가 물때를 더했듯, 나는 환란을 더했다. 단위만 다른, 같은 누계의 다음 항으로.
다 적고 나서, 나는 마지막으로 한 줄을 더 적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네 묶음의 표지마다, 회사의 장부마다, 보유고의 여백마다 있던 그 한 줄. 이제껏 '우리'의 손이 적던 그 서명. 나는 그것을 내 손으로 적었다. 처음으로.
우리는 조금 더 보고 있다.그 한 줄을 적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바깥의 누군가가 아니었다. 나를 찍던 손, 빈 칸을 대신 채우던 손, 내 사번으로 응답을 보내던 손 — 그것은 이제 내 손이었다. 나는 '우리'에 들어갔다. 다섯 번째 손, 여섯 번째 손, 그 다음 손. 읽고, 옮기고, 다음 독자에게 건네는 자. 던컨 신부의 경고가 향했던 '읽는 우리'가, 마침내 나를 포함했다.
판독기 옆, 꺼 둔 구내 단말이 한 번 울었다. 나는 이제 그것이 무섭지 않았다. 화면에는 한 줄의 전문이 떠 있었다. 발신자는 나였고, 수신자도 나였다. 내용은 짧았다.
다음 상자가 도착했다.자료실 문 앞에, 새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프나코틱 문고의 것이었다. 표지에 받는 이의 이름은 아직 비어 있었다 — 나 다음의 기록 담당, 아직 이 회사에 오지 않은 누군가의 이름을 기다리며. 그리고 그 상자 안에는, 다섯 번째 묶음이 들어 있을 것이었다. 1997년 가을, 한 종금사 자료실에서 끝까지 읽고 옮겨 적은, 김도경의 일지가.
수렴하는 날짜는 아직 며칠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날 이후를 적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