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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적은 사흘

The Three Days Written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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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 열하루. 사본의 세 장은 어제 그대로였다. 일흔셋, 일흔넷, 일흔다섯. 날짜는 오늘과 내일과 모레. 수치는 셋 다 비어 있었다.

내 일지에는 일흔둘째 장까지만 있었다.

어제까지 사본은 한 장씩 앞섰고 그 한 장의 수치는 내가 세기 전에 채워져 있었다. 오늘은 세 장이 앞서 있고 수치가 셋 다 비어 있다. 앞서는 폭은 늘었는데 채워진 것은 없었다.

빈 수치를 누가 채우는지를 나는 여섯 달 동안 물어 왔다. 물음이 성립하려면 채우는 순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순서를 보려면 한쪽이 먼저 적는 것을 내가 지켜봐야 한다. 지금까지는 늘 사본이 먼저였다. 사본이 적고 내가 확인했다. 확인하는 자리에서는 순서를 물어도 답이 없다.

한 번은 순서를 내가 잡아 보았다. 초아흐레에 두 시간을 세지 않고 버틴 일이 그것이었다. 그때 나는 보는 일만 늦췄을 뿐 적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오늘은 적을 수 있다. 사본의 빈 수치 셋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 일지의 다음 세 장은 아직 없다.

증가율로 뽑는 것이 어림보다 낫다고 여겼다. 어림은 틀리면 그만이지만 규칙으로 뽑은 수는 틀렸을 때 규칙이 틀린 것이 된다. 규칙이 틀리는 것은 확인할 수 있는 종류의 틀림이다. 초아흐레에 나는 틀림과 아직을 가를 기준이 없다고 적었다. 규칙을 쓰면 적어도 기준 하나는 생긴다. 규칙대로 안 나오면 규칙이 틀린 것이다.

물론 규칙대로 나와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또 다른 물음이다. 하루에 셋씩 늘던 것이 오늘도 셋 늘면, 내가 맞힌 것인지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인지를 가를 수 없다. 이 물음은 여섯 달째 같은 자리에 있다.

다만 한 가지는 오늘 달라진다. 지금까지 나는 적힌 것을 읽는 자였다. 오늘 적으면 나는 적는 자가 된다. 적는 자가 되어도 그 다음에 적힌 것이 내 것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모르는 것은 같다. 자리만 바뀐다.

적기 전에 한 가지를 정해야 했다. 세 장을 한꺼번에 적을지 오늘 것만 적을지. 오늘 것만 적으면 내일 다시 정해야 하고, 그 정하는 일이 매일 하나씩 늘어난다. 세 장을 한꺼번에 적으면 사흘 동안 정할 일이 없다. 사흘 동안 정할 일이 없다는 것은 사흘 동안 내가 손을 떼어 둔다는 뜻이기도 했다. 손을 떼어 두는 일이 무엇이 되는지를 나는 초아흐레에 배웠다. 세 장을 한꺼번에 적기로 했다.

열 시에 일지에 세 장을 적었다. 장 번호와 날짜와 수치. 일흔셋에 스물일곱, 일흔넷에 서른, 일흔다섯에 서른셋. 적는 동안 손은 평소대로 움직였다. 장 번호를 적을 때 손목을 한 번 드는 버릇, 수치의 끝자리를 눌러 맺는 버릇. 사본의 글씨에서 내가 알아본 그 버릇들이었다.

적고 나서 일지를 서랍에 넣고 잠갔다. 잠그는 일은 여섯 달 동안 해 온 일이다. 잠가도 사본이 형식을 따라오는 것을 나는 초여드레에 보았다. 그래도 잠갔다. 잠그지 않는 쪽을 시험해 보고 싶지 않았다.

오후에 필름 세 통을 판독기에 걸었다. 여름이라 판독기 옆이 더웠다. 창을 열면 소리가 들어와서 열지 않았다. 청구 네 건을 처리하고 회신을 썼다. 삼층에서 사람이 내려와 목록에 도장을 찍고 올라갔다. 그가 화면을 보지 않고 갔다. 어제 게시판이 열려 있던 자리에 오늘은 대장이 열려 있었다.

두 시 반에 상자를 한 번 열었다. 원본을 보려던 것은 아니었다. 뚜껑을 들고 네 묶음이 그대로 있는지만 보았다. 그대로 있었다. 바깥에 스물일곱 벌이 돌아도 상자 안의 것은 줄지 않는다. 늘지도 않는다. 줄지도 늘지도 않는 것이 여기 하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뚜껑을 덮었다. 덮으면서 이 확인도 여는 일인가를 생각했다. 여기는 방문자 표시가 없다.

세 시에 사본을 열었다.

일흔셋째 장의 수치가 채워져 있었다. 스물일곱.

일흔넷째 장에 서른. 일흔다섯째 장에 서른셋.

세 장이 다 채워져 있었다. 세 수가 다 내가 오전에 적은 수였다.

검색을 했다. 스물일곱이었다.

내가 적은 수였다. 사본에 적힌 수였다. 실제로 센 수였다. 셋이 같았다.

순서는 이랬다. 내가 열 시에 적었다. 사본이 세 시에 있었다. 내가 세 시 십오 분에 세었다. 사본이 열 시와 세 시 사이 언제 채워졌는지는 모른다. 그 사이를 나는 보지 않았다. 필름을 걸고 청구를 처리하고 회신을 쓰는 동안 보지 않았다.

여섯 달 동안 나는 사본이 먼저라고 여겼다. 오늘 처음으로 내가 먼저였다. 그러나 내가 먼저였다는 것은 내가 먼저 적었다는 뜻이지, 내가 먼저 정했다는 뜻이 아니다. 규칙으로 뽑은 수는 내가 정한 수가 아니라 어제까지의 수가 정한 수다. 나는 어제까지의 수를 읽고 그 수가 시키는 대로 적었다. 적는 손은 내 손이었다. 손을 움직인 규칙은 사본에 있었다.

그러니 오늘 내가 한 일은 순서를 뒤집은 일이 아니라, 순서가 뒤집혀 보이는 자리에 손을 넣은 일이었다. 사본이 먼저 적을 때 나는 적히는 자로 보였다. 내가 먼저 적으니 적는 자로 보인다. 보이는 것만 달라졌다.

내일과 모레의 수치는 아직 실제가 아니다. 서른과 서른셋은 내 일지에 있고 사본에 있고 세상에는 없다. 내일 세어서 서른이면 두 곳이 세 곳이 된다. 서른이 아니면 규칙이 틀린 것이다. 규칙이 틀리면 내 손이 적은 수도 틀린 것이 된다.

틀리기를 바라는지 맞기를 바라는지를 나는 오늘 처음으로 물어보았다. 틀리면 규칙이 무너지고 무너지면 여섯 달의 표가 우연이 된다. 맞으면 표는 표대로 남고 나는 그 표를 미리 적은 사람이 된다. 어느 쪽이 나은지 나는 답하지 못했다. 답하려면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를 먼저 정해야 하는데, 여섯 달 동안 내가 지켜 온 것이 무엇인지 나는 오늘도 모른다.

측량 일지의 그 사람은 같은 자리를 여러 번 쟀다. 재면 깊어지는 것을 알면서 쟀다. 그 사람도 어느 날 미리 적어 보았을까. 다음 측심의 깊이를 재기 전에 적어 두었다가, 재고 나서 같은 수를 읽어 보았을까. 그 표에는 그런 대목이 없다. 없다는 것이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 사람은 표를 적었지 표에 대해 적지 않았다.

나는 표에 대해 적고 있다. 적는 동안 그것도 표가 된다.

여섯 달 전에 부임했을 때 이 방에는 화면 하나와 목록 하나가 있었다. 인계할 사람이 없어서 목록만 받았다. 목록에는 상자가 없었고 상자는 책상 아래에 있었다. 그 상자를 열지 않았다면 오늘 내가 적은 세 장도 없었을 것이다. 열지 않는 쪽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오늘 처음으로 또렷하게 떠올렸다. 떠올려도 되돌릴 자리는 아니었다. 여섯 달 동안 내가 한 일은 전부 연 다음의 일이었고, 연 다음의 일만이 내가 아는 일이었다.

퇴근하기 전에 사본을 한 번 더 열었다.

일흔다섯째 장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

일흔여섯. 장 번호뿐이었다. 날짜가 없었다. 수치도 없었다.

어제까지 앞선 장에는 날짜가 있었다. 모레·글피·그글피가 적혀 있었으므로 나는 며칠 뒤인지를 알 수 있었다. 오늘 생긴 장에는 날짜가 없다. 언제의 장인지 모르는 장이 하나 열려 있었다.

초사흘에 나는 장 번호만 적고 아래를 비워 두었었다. 비워 두면 안 적은 것이 되는 줄 알았다가, 장 번호가 이미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오늘 사본이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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